아침 뉴스 기사를 읽는데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운 내용에 기가 막혔다. 월드컵 가나와의 경기에서 진 선수들을 비난하는 악플이 달렸다는 기사다. 경기를 지켜본 필자가 분함을 식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더욱더 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악플을 달 수 있단 말인가. 선수들이 진 것 말고는 잘못한 행동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비난하는 것인가. 오로지 졌다는 이유로 비난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인 일이다. 악플을 단 자들 눈에는 선수들의 노력과 투혼과 아픔이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악플이고 누구를 위한 악플인가.
어제 누님과의 통화 중에 가나 경기에서 진 것이 속상해서 지난밤에 잠을 잘 못 잤다고 들었다. 필자도 경기가 끝나고 같은 심정이었다. 정확하게 경기는 아쉽고 억울하고 화가 날 만큼이었다. 우루과이 경기처럼 골대가 도와주는 운도 없었다. 처음 2:0으로 지던 포기 상태에서 2:2가 되며 강한 희망을 지녔고 3:2로 지고 마지막 코너킥을 몰수당하면서 끝난 경기는 심리적으로 아쉬움과 억울함을 최고로 극대화하였다.
경기를 본 모든 국민이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표출되는 방식은 모두가 달랐다. 누님은 잠을 설쳤고 누군가는 경기에 진 선수들에게 악플을 달았다. 물론 김연아 선수가 챔피언이 되었을 때도 악플러는 있었다. 예수님은 반대파에게 죽임을 당하셨고 부처님도 늘 비난을 당하셨다. 하지만 성현들도 그러하셨으니 악플이 늘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기사에서 벨기에와 경기를 진 캐나다에서 ‘경기에 졌지만 존경을 얻었다’고 국민들 칭찬을 받은 것과 비교했다.
악플과 훈계는 다르다. 경기에 임한 선수 중에 경기장에서 이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없는 이가 있었다면 그는 선수로서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경기에 진 것이라면 상심한 선수들을 위로하고 칭찬해주는 것이 먼저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어 보인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선수들 모두 칭찬받아 마땅하다. 악플러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배설할 장소와 대상을 찾은 것뿐이다.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자들이다. 이와 유사한 감정현상에 집착과 사랑이 있다. 자신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감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이 고통을 받으면 사랑이 아닌 집착이고 스토킹이다.
악플러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상대방의 행동과 결과는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악플러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극대화하여 자신의 기분을 최대한 좋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대다수가 미성숙한 초딩들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에게 명예로운 패배에 대한 교육을 주지 못한 사회에도 강한 책임이 있다.
이번 경기에서 진 선수들에게 위로는 못할망정 악플을 단 자들은 보면서 깊은 아픔과 슬픔을 느낀다. 우리사회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성숙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며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이런 사회 현실에 창피함마저 느낀다. 선수가 경기에 지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 기라성같은 축구 종주국들을 제치고 16강에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쉬운 경기에 진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뺏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때는 비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지만 실력이나 운이 부족했다면 비난이 아닌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다. 운은 사람이 만들거나 바꿀 수 없고 실력 또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의 대표 표어인 ‘꿈은 이루어진다’ 속에 ‘항상’도 ‘반드시’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이유다.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행위와 과정이 위대하고, 그 열정으로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이 열린다. 악플은 그런 열정과 미래가치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위험하다. 악플러의 미성숙한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