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재앙이 막 시작되던 2년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장편 국제영화상)에서 “The Oscar goes to Parasites”라는 호명을 받자 전 국민이 다 함께 기뻐했다. 2년의 시간이 흘렸지만, 그때의 기쁨은 아직도 우리 국민 대부분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가 영화광이긴 하지만 한가롭게 영화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절대로 기생충이 될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다소 야비한 수단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계층 상승을 위해 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기생충은 영화 속의 주인공 기택 가족처럼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자유시장경제체제의 패자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과 유착해 자신들만의 경제적 이익과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 같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다.
처음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하여 시민으로서의 ‘작은 권리 찾기 운동’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불법이던 국회의원 낙선 운동을 펼치며 쑥쑥 성장했고, 나중에는 변신을 거듭해 정부 요직을 차지해 자정작용은 물론 그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권력 집단이 되어 버렸다.
필자 고교시절의 집권당 이름은 아주 아름다웠다. 민주와 정의가 샘처럼 솟아 넘치는 ‘민주정의당’이었다. 하지만 고교생에 불과했던 필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당시 집권당의 통치에는 민주나 정의로운 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40년이나 지났음에도 이 진리가 여전히 반복된다는 점이 놀랍지도 않다.
촛불혁명을 5년 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대며 적폐청산을 외쳐대던 지난 정권과 시민사회단체는 거의 한 몸과 같았는데, 문제는 수많은 시민단체한테는 정작 주인으로 섬겨야 할 ‘시민’은 안중에 없었다.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임기제 공무원이 되어 자신이 몸담았던 단체에 재정을 지원하는 시민단체형 다단계 생태계를 만들어 자치단체 재정을 축내왔다.
정권 최대의 채권자를 자임하던 어느 단체는 불법 정치 파업이나 공사현장에서 현금 갈취를 일삼으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모금 활동을 하던 ‘정의 어쩌고 연대’엔 아예 ‘정의’가 없이 현찰로만 부동산을 구매하던 재테크만 있었다.
여성단체 출신 정치인들은 권력형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긴커녕, 수사기밀을 누설해 가며 ‘피해 호소자’란 세종대왕도 울고 갈 신조어를 창제해냈고, 여성가족부 장관은 그로 인한 보궐선거를 “국민 전체가 성 인지성에 대한 집단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답변을 해, 피해자로부터 “그럼 나는 학습교재냐?”는 절규가 터져 나오게 했으며, 인권 단체에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동안 이들이 표방해온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운 이념과 이론은 자신들만의 이권추구에 필요한 각본과 소품, 도구들이었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들에겐 세상이 무대고 인생이 연극이었으니 개돼지였던 국민은 속임수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기와 기만에 기반한 사회는 절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필자는 다시 한 번 외쳐본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