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치과신문 창간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초창기부터 발전을 목격하고, 애독하며 원고를 투고해온 필자로서 감회는 특별했다. 서울지부가 서울대 출신 회원에서 5개, 10개, 해외치대 출신 회원으로 다양화된 시점에서 여론을 수렴하는 전문매체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전문의제 욕구와 치과의사회관 이전 문제에 따른 토론장이 필요했다는 치과신문 초대 발행인인 서울지부 안박 前회장의 소회도 절절했다. 예전 같으면 직접 선후배요 동창이라서 용비어천가적 기사만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치과신문은 엄혹했던 일제치하에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에 비유될 수 있다. 이젠 협회나 서울지부의 활동과 업적을 단순 보도하는 역할에서 탈피해 비판과 지적, 대안을 수렴하는 매체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치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한 것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탁월한 결정이다. 전국 배포의 당위성을 확보한 셈이다. ‘치과’라는 것이 축소지향적 어휘이긴 하지만 대중 인식에 기반한 총괄적, 일상 어휘이기 때문이다. 또한 뭐든 검색해보는 대세에 발맞춰 인터넷판을 개설해 포털사이트와 기사검색을 제휴한 것은 비약 중의 백미다.
도약 과정 중에 잊을 수 없는 두 분은 고인이 된 이민형, 이재윤 前공보이사다. 불법네트워크 치과들이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치과신문 편집인 중책을 역임했던 이민형 前이사는 필자와 동지감을 공유했다. 논조도 서로 비슷해서 교대로 비난 칼럼을 퍼부었다. 그는 필요할 때는 불법네트워크와 몸싸움도 불사하겠다면서, 한편으로는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송도로 이사하는 열혈 아비이기도 했다.
이재윤 이사는 필자를 볼 때마다 지난번 논단에 공감한다면서, 본인 부친이 필자와 비슷한 체형이라며 친근감을 표현하곤 했다. 전성기 나이에들 너무나 애석하다. 원장과 언론인, 투잡을 감행한 탓인가. 글 쓰는 정신노동의 힘듦은 한 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안다. 두세 달에 한 번 쓰는 논단도 그러한데, 매주 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몸을 던져 헌신했음에 숙연하다.
치과신문이 같은 기사를 다루더라도 협회 기관지와 시각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음은 숙명이고, 그것이 자유언론의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규 감사의 반박내용, 이재용 前편집인의 윤리위 회부 시도 건의 부당함, 선거 관련 소송 등 민감한 주제를 파헤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토론이 활발하다는 증거고 각자 여당지, 야당지 존재 역할에 충직한 결과다. 물론 팩트에 기반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바람직하다. 협회 입장에선 언론탄압의 향수가 꿈틀댔겠지만, 잘 참고 넘어간 노력도 엿보인다. 언론 비방에 시달리는 것은 리더의 숙명이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링컨은 반대파 언론에 시달렸고 전두환은 언론 통폐합을 하지 않았던가. 최근 협회장 인터뷰 기사를 게재함은 치과신문이 공정보도에 대한 원칙과 배포를 내보인듯하다.
신문광고 수준은 그 신문의 품격을 결정한다. 고언하지만 광고가 지나치게 많으면 독자는 상업지로 간주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독립채산제인 치과신문의 생사가 광고비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의 취사 선택을 신경써야 하는 이유다. 광고주가 믿고 선택할 좋은 신문은 좋은 기사가 만든다는 진실은 불변하다. 박리다매의 대량광고보다는 광고비를 올려도 미수금이 없는 적절한 임계점을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오늘의 치과신문 발전은 당연히 기사를 직접 작성하는 기자들 덕분이다. 그러나 그 이전 역대 회장들과 공보이사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간 두 이사분의 희생에 먹먹하다. 다음 기념식에선 고인 유가족들을 모시고 감사패를 증정해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