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코로나 비상사태가 종식된 이후 세상은 빠르게 팬데믹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특히 이동의 자유가 제약된 시기였던 만큼 그동안 여행에 목말랐던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해외로 향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2022년 초 엔데믹 선언을 하며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에게 다시 문을 개방했고 예상보다 많은 이가 다시 프랑스를 찾았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4,4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프랑스를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2023년 방문객 전체 통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1~4월 파리 지역 방문객은 1,160만명으로 2022년 대비 27.2% 증가, 팬데믹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단일 박물관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가 방문하는 루브르 박물관 또한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를 소장한 세계 최고 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지만, 많은 작품 중에 오직 모나리자만 떠올리고 방문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아쉬움이 공존하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즐거운 치과생활>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루브르 박물관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너무 익숙해 잘 모르고 있는 박물관의 역사 이야기와 왕궁에서 박물관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왕의 초상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선 루브르 박물관의 루브르는 어떤 뜻을 가졌는지, 단어의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몇 가지의 설 중 루브르가 5세기 프랑크족의 요새가 있던 자리였으며 프랑크 언어로 ‘로에버’라는 단어가 성채였기에 루브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을 것이란 설이 있다.
두 번째는 프랑스어로 늑대를 루프(Loup)라 부르는데 늑대 사냥꾼 조합 이름 ‘루파라’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작품이라는 프랑스 단어 ‘뤠브흐(l’oeuvre)’의 발음에서 나왔다는 언어유희 설도 존재한다.
본격적인 루브르의 역사는 12세기부터 시작한다. 루브르라 불리던 이 지역에 프랑스 왕 필립 오귀스트는 센강을 타고 내려와 파리를 약탈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감시용 성을 건설한다. 루브르의 첫 목적은 파리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지어진 곳이었다(이 모습은 현재 루브르 쉴리관으로 입장하면 해자와 탑 등을 그대로 발굴, 전시하고 있다). 이후 14세기 초 샤를 5세가 머물며 왕궁으로 쓰이는 듯했으나 백년전쟁으로 왕실이 파리를 떠나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1528년 프랑수아 1세가 쇠락한 루브르를 왕궁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 문화를 동경하던 왕은 자신의 소장품을 위한 전시관을 만들어 궁전의 일부를 왕실 갤러리로 사용한다. 이후 왕권신수설이 등장, 왕의 힘이 더욱 커지며 루브르궁은 화려하게 확장되었지만, 루이 14세의 변심으로 왕실이 베르사유로 떠나버리게 된다. 비워진 루브르궁은 예술가들의 작업장으로 사용되는 등 화려함이 사라져가다 루이 16세 시절 왕실 유물을 정리하는 공간으로 다시 활용되며 잠시 활기를 찾아간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다.
1793년 혁명 정부는 예술작품은 사람의 영혼을 적셔주고, 예술가를 키우는 존재이기에 국가가 소유해 만인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공공적 선언을 하며 왕실과 귀족의 소장품 660여 점을 공개하기로 한다. 그리고 혁명의 결과물답게 <공화국 예술 중앙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공공 박물관의 시작을 알린다.
오랜 역사를 이어오던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적인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된다. 1981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는 1989년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가 설치되고 재무부가 사용하던 공간을 이전, 모든 공간을 박물관으로 바꿔내는 프로젝트를 1993년에 끝내며 현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유리 피라미드는 루브르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건물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은 루브르를 상징하게 되어 에펠탑 다음으로 파리에서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랜드마크가 된 곳이다.
오늘날의 루브르 박물관은 1871년 화재로 사라진 부분을 제외한 커다란 디귿(ㄷ)자 모양과 미음(ㅁ)자 모양이 연결된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효율적인 관람과 관리를 위해 관을 3개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관의 이름은 모두 루브르와 관련된 인물을 따, 쉴리, 리슐리외, 드농으로 불린다.
쉴리관은 중앙의 미음(ㅁ)자 형태의 건물로 쉴리는 앙리 4세 시절의 재상으로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극심하던 시절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현재 쉴리관에는 ‘밀로의 비너스’와 이집트 유물, 로코코 회화가 전시되고 있다.
리볼리 길과 맞닿은 곳이 리슐리외관이며, 리슐리외는 우리에게는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추기경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극에서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루이 13세와 14세 시절까지 재상을 거치며 강력한 프랑스 왕권을 만들어 내며 프랑스를 유럽의 최고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명재상이다. 리슐리외관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 ‘나폴레옹 3세 아파트’, 벨기에와 네덜란드 회화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센강 쪽의 전시관이 드농관이다. 드농은 루브르 박물관의 초대 관장 도미니크 비방 드농(Dominique Vivant Denon)의 이름이다. ‘모나리자’, ‘민중을 이끄는 자유’,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등 루브르를 대표하는 작품이 가장 많은 전시관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매년 900만에서 1,000만명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분당 50명씩 입장,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가 방문하는 박물관의 타이틀을 놓치지 않고 있다. 크기 또한 3개의 전시관을 직선 형태로 펼치면 약 14.5km에 이르고 전시 공간만 축구장 10개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기원전 유적부터 19세기 중반 낭만주의까지 작품 수만 48만 점이 넘는다. 그중 공개된 작품은 3만 5,000점 정도로 작품마다 10초의 시간을 할애해 감상한다면 4일이 꼬박 걸린다. 한 번의 방문으로 루브르 전체를 관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효율적인 관람을 위해 박물관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을 가장 추천하며, 이후 개인적으로 보고 싶은 작품을 추가로 나눠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루브르가 박물관으로 변화하는 데 영향을 준 왕이 몇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왕은 루이 14세다. 그의 재임 시절 1667년 왕립 미술학교 주최로 새로운 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한 전시회가 루브르에서 처음으로 개최됐지만 이는 일부 제한된 인원에게만 개방된 전시회였다. 이어 1699년에는 그랑 갤러리에서 예술가 후원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열고, 일반 대중에게도 최초로 전시를 공개했다.
이 전시회들은 이후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된 살롱전의 모티브가 되었고 미래 루브르가 박물관이 되는 것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쉴리관에는 스스로 태양이며 예술가라 생각했던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있다. 이야생트가 63세의 루이 14세를 그린 작품으로 유럽 왕의 초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초상화는 스페인의 왕이 된 손자에게 선물로 보내기 위해 그려진 작품이었지만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왕은 자신이 소장하기로 하고 다른 작품을 손자에게 보낸다.
그림 속 왕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화려하고 위엄이 넘친다. 왕의 푸른 망토 안감에는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흰 담비 털, 겉감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하다. 허리에는 샤를마뉴의 보검을 차고 오른손에는 왕 홀을 쥐고 있으며 왕 홀의 옆으로는 왕관과 왕의 대관식에 사용되는 정의의 손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이 왕의 힘과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키가 크지 않았던 왕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닿기 위해 빨간색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돋보이는 자세를 하고 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화려한 보물들보다 눈에 더 띄는 부분은 왕의 자세다. 루이 14세는 어릴 적부터 발레를 좋아해 재위 시절 20편이 넘는 발레에 직접 출연할 정도로 애호가였다. 그가 얼마나 무용을 좋아했는지 초상화 속에서도 발레리노의 자세와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드러난 스타킹을 신고 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남긴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정치선전의 소재로 적극 활용했다. 그림 속 자신을 실물보다 크고 더욱 화려하게 그려 관람자가 우러러볼 수 있는 높이에 걸어 두곤 했다.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듯 그려진 초상화를 위세 초상화(Swagger Portrait)라 부른다. 하지만 그림은 루이 14세의 실제 모습과 너무도 다른 상상화이기도 하다.
그림 속 왕의 얼굴은 63세의 노인의 모습이지만 다리는 젊은이의 근육으로 그려졌다. 오랜 경험이 드러나는 현명하고 준엄한 왕의 얼굴과 여전히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진 왕의 몸이 하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강건함과 존엄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왕의 숙명이기에 이 정도의 프로파간다는 당연한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빛이 너무 밝으면 그림자도 더욱 짙은 법, 평생을 화려한 궁전 생활 속에서 추앙받다 살다 간 왕이었지만, 그는 10대 때부터 끊임없이 다양한 병에 시달린 기록이 남아있다. 왕은 동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었던 20~30대를 훨씬 뛰어넘는 76세까지 장수를 했지만, 종기를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등 발전하지 않은 의술로 원시적인 치료를 받으며 평생을 고통과 함께했다.
그는 14세에 천연두를 앓았고 성홍열로 인해 20대에 머리카락이 빠져 아침마다 가발을 고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기도 했다. 과한 식사는 물론 당도가 높은 각종 디저트를 달고 살아 장에도 잦은 문제가 발생했고 치아도 좋지 않아 치아를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발치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치아 수술이 잘못되어 입천장에 구멍이 났고 이를 다시 막기 위해 뜨거운 쇠로 지지는 수술을 받기도 한다. 몸의 여러 곳에 염증이 생겨 왕은 악취를 풍겼고 많은 이가 그의 앞에서는 태양왕이라 칭했지만, 뒤에서는 냄새왕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이야생트가 초상화를 그릴 시기에는 통풍으로 일어서기도 힘들어 휠체어에 의존했다고 전해진다. 왕의 초상화에 화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그려졌을지 느껴지는 부분이다. 실제 루이 14세는 포즈를 취할 시간이 없었는지, 일어설 기력이 없었는지 화가는 왕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왕의 얼굴을 작은 캔버스에 그린 다음 초상화 속에 얼굴 부분만 따로 붙여 넣어 그림을 완성한다. 루브르를 방문해 그림의 정면에서 서서 바라보면 구분이 조금 어렵지만 조금만 옆으로 서서 그림을 대각선 방향에서 감상하면 화가가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있으니, 박물관을 찾을 예정인 이는 실제 눈으로 확인해 보길 바란다.
루이 14세를 비롯해 여러 왕의 개인적인 취미와 욕망으로 예술품이 수집되고 전시가 되며 시작된 루브르였지만, 그들의 작품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자신의 작품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날은 세상에서 누구나 찾아 여전히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돌아가는 곳이 루브르 박물관이다.
가끔은 세로 73cm, 가로 53cm의 작은 그림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가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고작 저 작은 작품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것인지 실망감을 표현하는 이도 있지만, 모나리자는 루브르에서 꼭 봐야 할 훌륭한 그림이 맞다. 그렇다고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7000년 전의 작품부터 1800년대까지 서양인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과거에 살았던 이들의 흔적 속에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며 대화를 나누는 장소다.
다음 파리 방문에는 어떤 작품이 나의 마음을 울리는지 시간의 흐름 속에 푹 빠져 나만의 루브르 박물관을 만들어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박물관은 정말 살아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