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육활동을 침해당한 보건교사가 교권보호위원회에 신고했다. 위원회에 회부된 고등학생은 학교장을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법원은 교권보호위원회 심의 결과 통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하고 소송비용도 모두 부담하라고 학교장에게 명령했다.
사건 내용은 원고 학생이 점심시간에 보건실에 찾아가 보건교사에게 아무런 사전 양해도 없이 상담 중인 다른 학생에게 “잠시 나가 달라”고 했다. 이런 학생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생각한 교사는 학교 측에 심의를 신청했다. 학교장은 학생이 보건교사의 교육활동을 침해했다고 판단하고 교권보호위원회 심의를 요청했고, 위원회는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에 따라 학생의 행위가 교육활동 침해했다고 인정하고 보건교사에게 심리치료와 상담을 지원했다. 학생은 징계 등 별다른 조치를 받진 않았지만, 특별법에 의해 피해 교원의 보호조치에 필요한 비용은 학생이나 학부모가 부담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학교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서 학생은 당시 보건 선생님이 다른 학생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이어서 상담을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다른 학생에게는 정중하게 나가 달라고 부탁했고,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는 등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학생 행동이 정당한 교육활동을 간섭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반복성이 없어 교육활동 침해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교원지위법에 따르면 교육활동 침해는 부당한 간섭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뤄질 경우 인정된다. 원고가 반복적으로 보건 교사의 교육활동에 간섭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여기서 근본적인 모순이 생긴다. 교육의 원칙과 법의 원칙이 다름이다.
한번 시작한 잘못을 고침으로써 반복된 잘못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법이 요구하는 반복된 잘못을 하는 순간 이미 교육이 아니다. 교육이 실패하여 반복될 때를 대비해 교정하는 것이 법의 역할이다. 반복되면 이미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교육은 처음을 잡아내는 것이고 법은 최종을 보고 최소의 판단을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개념에서 후속적 처치인 법이 선제적 처치인 교육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법이 교육적 판단을 법적인 해석을 하면 교육이 무너진다.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기고, 교육적 판단을 존중해 주어야 교육이 산다. 법원이 교육자들의 판단을 법적인 잣대로 판단하며 교육을 도륙하는 것을 판사들이 모르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법은 최소의 처벌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파급효과가 느리다.
반면 교육적 효과는 빠르게 나타난다. 느린 법이 빠른 교육을 판단하면 사회는 이미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나중에는 더 큰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이 판결로 앞으로 학교 현장에서는 수많은 소송이 제기될 것이고, 교권은 더욱 추락했다. 앞으로 교사들은 학생들의 반복적으로 잘못을 행할 때까지 참아야 하는 수동적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무슨 교육이 가능할 것인가.
교육의 근본적인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법원이 또 한 번 엄청난 무지한 판결을 하였다. 영악한 학생들이 이 판결을 악용할 것을 모르는 법원이 한심하기만 하다. 어떻게 침해는 되었는데 반복된 행동이 아니니 무죄라고 할 수 있는가. 한번 때렸는데 반복된 것이 아니니 무죄라는 것인가. 학생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어떻게 소송비 전액을 학교에게 전가하는가. 정말 ‘내부자’ 영화에서처럼 모르는 내부자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 판결문은 교육자들에게 참담함을 준다. 어찌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나.
법이 의료를 판단하면서 의료계가 무너졌다. 2017년 이대목동병원에서 신생아 4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의료진 3명을 구속했다. 이때부터 생명을 다루는 중증의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법원이 중환자를 돌보았던 의사를 구속하며, 후학들이 중증의료계를 기피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모두 무죄를 받았다. 얼마나 무지한 법원인가.
의료를 죽인 법원이 교육을 또 죽인다. 국가적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원은 반성하고 변해야 한다. 세상은 이미 저만치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