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로마인 이야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사오노 나나미는 “이웃나라끼리 친한 곳은 없다”라고 말하며 한국인과 일본인을 떠나 동양인이라는 관점에서 서양사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녀의 말처럼 호주와 뉴질랜드, 프랑스와 독일 등 가까운 나라는 친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이 많기 때문이다.
친한 일본 친구가 많은 필자에게 최근 극우주의자 아베의 극단적 선택은 그리 달갑지 않다. 물론 미국이 트럼프가 전부가 아니듯 아베가 일본을 대변하진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누군가의 선택에서 변화가 시작되어왔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누군가의 선택은 늘 역사를 바꾸었다. 괴철이 조언한 3국 분할을 한신이 받아들였다면 유방은 한나라 건국이 어려웠고, 우리는 또 다른 삼국지를 읽었을 것이다. 진나라 승상 이사가 사구정변에서 지록위마 간신 조고의 유혹을 뿌리쳤다면 진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면초가에서 항우가 훗날을 위하여 오강을 건넜다면 유방이 전쟁에 질 수도 있었다. 오월동주의 부차가 오자서의 충고를 들었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매순간마다 행한 선택이 결과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완벽한 허를 찌르는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성공했다. 하지만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은 미국을 움직이게 했고 결국 빠른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아베는 우리도 모르는 한국의 가장 아픈 곳을 찾아 반도체를 겨냥해 무역 규제를 도발했다. 그런 면에서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삼성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산업 기술의 현주소를 실감했다. 삼성의 실상은 우리의 현실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업 성장기에 중소기업들이 일본 중소기업과 기술이나 품질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과 겹치는 중소기업은 생존하기 어려웠다. 결국 반쪽 산업화였다.
그런데 아베의 회심의 한방 선택은 우리 국민에게 모르고 있었던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대기업에게는 자국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이젠 대기업들도 싸고 좋지만 휘둘릴 수 있는 일본 중소기업과 휘둘리지 않을 한국 중소기업 사이에서 보험을 드는 마음으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현대화 과정에서 기술과 가격 때문에 구조적으로 일본 중소기업을 넘을 수 없어서 포기해야만 했던 우리 중소기업들이 이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아베의 선택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산업구조가 일본과 얽히고설켜 있어 분리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우리 중소기업들이 일본과 대등한 경쟁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우리 산업경제 구조의 문제를 아베가 한 번에 정리해 주었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 다양한 이유로 어떤 선택을 했지만, 결과는 늘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한신도 그랬고, 부차도 그랬다. 한국의 가장 아픈 곳을 잘 찾아서 한 방에 충격을 준 아베는 그런 면에서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 역사는 늘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힘이 있었다. 기술선진국이란 착각과 산업구조 문제점을 한방에 정리해 주었다.
이제 중소기업들이 일본 그늘에서 벗어나 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싹이 튼 씨앗이 나무가 되는 데는 10년은 걸린다. 아베의 선택이 뿌려준 씨앗의 결실은 10~20년 뒤에 나타날 것이고 그때는 진정한 기술선진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하였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유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도 로마가 가르쳐주었다. 이제 우리 경제 구조가 일본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그가 가르쳐주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행할 또 다른 그의 선택이 흥미롭다. 그의 새로운 선택이 우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게 할지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