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필자를 비롯한 남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부디 남자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갖고 읽기를 권한다. 한 환자가 지방출장 중에 교정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여 환자와 가까운 곳에 개원한 동문을 찾으려고 명부를 뒤적거리다 반가운 이름하나를 발견하였다. 대학 때 친하게 지냈으나 졸업 후 본지 오래된 여자후배였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고 반가운 마음을 주고받고 환자를 부탁하며 근황을 묻는데 왠지 그냥 편하지 않은 듯 한 느낌이었다. “병원일?”하고 물으니 “아뇨”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고 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나이 50살이 되도록 이런 저런 형제나 친구, 친척들의 가정사들을 보고 들으며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 필자만의 이론이 하나 있다. 조금 저속한 표현이라 글로 써도 될지 모르겠으나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는 듯 하여 중간 글자는 O로 하여 적는다.
‘효자O끼 개O끼 이론’이다.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은 효자가 되어야 할 역사적 운명을 띄고 태어났나 보다. 불효자는 공공의 적이다. ‘그럼 그냥 엄마랑 살지 왜 결혼은 해서 아내를 만들어야하는지’가 모순의 시작이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 순간부터 두 개의 모순이 발생한다.
남자에게는 효도해야 할 엄마와 사랑해야 할 아내가 생기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남편과 효도 받고 싶은 아들이 생긴다. 그런데 효도 받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장 눈앞에 닥쳐 있는 일들이 우선이다. 평소엔 아닌 것 같은 남편이 일만 생기면 정의의 사도처럼 효자가 되려고 사고를 친다.
시어머니에게 하는 것의 반만 친정 부모에게 해도 평생 업고 다니고 싶은 것이 결혼한 여자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런 이중의 모순은 어려서부터 존재하였고 익숙해져 있어서 대부분 남편들은 미적미적 하다가 결국 힘센 자 쪽으로 붙는 비겁함을 보인다. 그러면서 효도라는 명분으로 비겁함을 감추려 한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대하는 선택의 어려움은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이다. 양자택일의 불리함을 알고 얼버무림을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라면서는 또 다른 모순을 경험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부모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순진한 아이들은 처음엔 그대로 행동하려고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질문의 횟수가 줄어든다. 예를 들어 아빠들이 회사일로 피곤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나 부엌일로 바쁜 엄마에게 아이가 숙제를 물으러 왔을 때 어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로는 ‘언제든지 질문하라’고 하면서 실제의 행동에선 “바쁘다”든지, “눈치없다”라든지, “그런 것도 혼자 못하냐”고 야단을 치는 모순된 반응을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몇 번 경험하면 아이는 차츰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아이들로서는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는 상황’과 ‘묻지 않는다고 야단을 맞을 상황’에서 방황하는 자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를 심리학에서 이중속박(double bind)이라고 하며 아이들이 이중으로 곤란한 모순된 상황에서 속박 받는 상태를 표현한다.
이런 이중속박의 상태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된다. 어머니 말을 따르면 아내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아내 말을 따르면 어머니가 서운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눈치를 본다. 그래도 눈치를 보는 자는 심리적 갈등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피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문제를 인식 못하는 자이다. 효자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분 말이다. 효도가 종교이고 지상의 과제이니 모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아내의 상황과 기분은 고려할 여지도 없다. 모든 효자 남편을 둔 아내들의 마음은 ‘효자O끼 개O끼’일 것이다. 유교적 잔재가 생각 속에 남아 있는 이 땅에서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특히 며느리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효자 남편을 보는 일까지 하면 어찌 돌지 않겠는가?
남편들에게 효자가 되고 싶다면 아내가 깨기 전에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고 오라고 충고 하고 싶다. 아니면 부디 약이라도 오르지 않게 티라도 내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