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폐지된, 일요일 방송되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중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파트가 있었다. 단막극을 몇 개 보여주고 진실 여부를 게스트가 맞추는 게임이었다. ◯튜브를 시청하며 그와 유사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거짓이 의심되는 클립수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이런 거짓 클립은 치과 정보에도 넘친다.
본지 강호덕 논설위원이 쓴 ‘필터버블에 갇힌 환자들’에서처럼 환자가 “◯튜브에서 임플란트도 38만원인데 크라운이 더 비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항의하는 사태가 모든 치과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튜브 클립이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원치 않는 진실게임으로 들어가게 된다. 게다가 환자입장에서는 본인에게 유리한 것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작동하여 치과 답변을 불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치과 직원은 환자를 이해시키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은 이런 상황에서 진실게임을 피하는 방법으로 대화의 구조를 전환시키는 것을 추천한다. 진실게임 구조에서 명품선택으로 프레임을 전환시킨다. 어떤 가방은 2,000원 하고 어떤 것은 2,000만원을 하는 이유가 있듯이 치과에도 가격 차이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의 프레임을 전환시킨다.
요즘 시대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않는 시대다. 미국에서 이민단속국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사건 클립이 진실을 보여주는데도 정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힘 있는 정부가 원하는 주장을 할 뿐이다. 이 시대가 진실보다 이익에 의하여 움직이는 시대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500년 전 공자가 춘추를 집필하던 춘추전국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오로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다. 힘이 진리였다. 힘 앞에 이익 없는 진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옛날 어떤 나라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송사가 임금 앞에 왔다. 임금은 두 사람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가 아파지자 둘 다 죽이면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와 피고를 모두 죽이자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 후로 그 나라에서는 송사가 사라졌고 임금이 머리 아플 일도 없어졌다. 공정한 세상에서는 진실이 거짓의 우위에 있다. 하지만 힘이 진리인 세상에서는 거짓이 진실보다 우위를 점한다. 거짓을 규명하기 매우 어렵고 진실을 밝힐 시간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나마 사람인 경우에는 양심이 작동하여 표정이나 태도의 일관성 등과 같은 인지적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튜브와 같은 디지털세상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더욱 힘들다. 게다가 알고리즘으로 시청자가 선호하는 클립만 찾아서 보여주기 때문에 더더욱 판단하기 힘들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다음은 믿음으로 넘어간다. 이는 종교적 믿음과 유사하며 다음으로 신념으로 넘어간다. 신념이 생기면 전파하려는 단계로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이비종교 신도처럼 어떤 진실을 보여줘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현실 속에서 자신들 믿음이 성취되는 사건을 한 번 정도 경험하면 생각은 더욱 공고히 되어 결코 변하지 않는 신앙 단계까지 이른다. 이쯤 되면 스스로 몸으로 처절하게 체험해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사고는 인지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일단 만들어지면 바뀌는 것이 매우 어렵다. 진실과 거짓 또한 사고의 메커니즘에 기록되면 판단의 기준이 바뀐다. 진실을 보여주는 클립을 눈으로 확인해도 사고의 메커니즘이 판단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지금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고전 중용(中庸)에서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성자 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 진실은 하늘의 도리이고, 진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 하였다. 그럼 왜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진실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시대에 확실히 어려운 질문이다.
법구경(法句經)에 “거짓을 말하고 진실을 멀리하는 자는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과 같다. 진실은 가장 달콤한 맛이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삶이다”라고 했다. 손해는 별개의 문제지만, 확실한 것은 진실은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