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미국정신의학회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 DMS-4」에 한국인의 화병(홧병:火病)이 ‘hwa-byung’으로 ‘한국의 문화관련 증후군으로서 분노의 억제로 인하여 발생되는 분노장애’라고 등재됐다. 그런데 2013년 개정판 DMS-5에서는 빠졌다.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한국인만의 고유한 정서라기보다는 외국에서도 비슷한 사례(캄보디아의 캘캡)가 발견되어 문화적 고유성이 희석된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즈음에 한국사회에서 ‘화병’이란 단어가 사라졌다고 본다.
화병은 한마디로 참고참고 또 참아야 생기는 병이다. 옛날 며느리처럼 시어머니 구박과 백수 남편 술주정, 망나니 자식의 뒤치다꺼리하며 쌓인 한숨과 한 맺힌 설움이 쌓이고 쌓여서 생긴 것이 화병이다. 독립 이후에 한국전쟁을 겪고 대부분 가정은 모두가 실업자로 지독한 가난이 일상이었다. 가장도 자식도 모두 백수다 보니 엄마이자 아내이고 며느리인 여성들이 바느질이나 품삯 받는 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참으며 화병이 생겼다. 군사독재와 산업화과정에서 가장들이 취업은 되었으나 사회의 한 부품으로 존재하며 인권은 무시되었다. 이런 가장들은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참으면서 화병이 생겼다. 유교에서 내려온 사고방식은 급격한 근대화를 지나며 다양한 형태의 화병을 만들어냈다. 민주화 이후 인권에 대한 개념이 높아지며 상대적으로 유교적 개념이 희박해졌다.
그러다 2010년 이후에는 전통적인 개념의 화병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그런 이유로 DMS-5에서 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년이 지난 요즘 화병이 났단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없다. 손주를 돌보기를 거부하는 할머니도 있다. 일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편하게 일할 직장이 없다. 옛날 며느리들처럼 화병이 쌓일 일은 없는 시대다. 서양인들이 화병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이젠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화병을 달고 살았던 세대가 이제 80~90대가 되었다. 그들로부터 두 세대를 지나 안젤리나 졸리를 모르는 손자들은 화병도 모른다.
자신들이 겪었던 화병을 자식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셀 수 없이 참아서 만든 사회가 지금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윤리는 심하게 무너진 반면 인권이 너무 과도하게 앞서나간 모양새다. 심지어 학생 인권이 선생님의 교권을 넘어섰다.
최근 광주 모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추첨으로 자리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를 거부한 학생이 담임 여선생님을 교탁 앞에서 5분간 구타하여 실신시킨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유추된다.
우선 고2 학생이 단체가 정한 룰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지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단체 결정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담임교사를 구타한 것은 한국 학교 교실에서 교사 권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교사가 실신할 정도로 구타가 5분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주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방관자적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넷째는 도덕과 윤리성이 강한 광주에서 발생한 것은 이미 전국이 무너졌음을 암시한다. 물론 뉴스에 나온 정보만으로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5분간 구타가 지속되도록 말리는 학생이 없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유교적 도덕개념이 깊은 광주에서 고2 학생이 학급 학생 전체의 결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집행하려는 선생을 구타한 사건은 단순히 그 학생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개인 문제보다는 개인적 행동이 도덕과 윤리적 테두리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학교 교육이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선조들이 참고 참았던 이유는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이 아니다.
요즘 개인이 참을 일이 없어지며 화병은 사라졌지만, 묻지마 범죄 등으로 그 대가를 고스란히 사회가 감당하고 있다. 학교에서 권리에 따른 책임도 가르쳐주어야 하건만 교육이 무너지며 개인의 모든 분노가 여과 없이 사회로 표출되고 있다. 교육을 무너트리고 선생님의 교권을 파괴한 것에 대한 대가를 사회가 지불하고 있다.
하루빨리 교권이 회복되고 교육이 살아나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