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보이는 모든 뉴스는 한마디로 대립이다. 모두가 대립을 위한 대립이다. 물론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모습이다. 그럼 이런 대립은 언제부터였을까?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이후로 전혀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갈라치기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활발하게 혼인하던 사이였다. 역사적으로 지역감정이란 용어는 없었다. 그럼 역사적으로 정치권에서 극심한 대립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조선 초기에 많은 가문들은 혼인을 통해 서로 엮여있는 상태여서 그렇게 심하게 대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럼 시작이 언제일까. 고려로부터 조선을 건국한 왕조는 초기자금으로 고려시대 각 지역의 몰락한 호족들 재산을 이용하며 충분한 왕권 강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기(연산군~명종)에 들어 자금이 부족해지면서 왕권이 서서히 약화되었고, 신권이 강해지는 상태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쟁이 4대 사화를 유발하였다. 40년 정도 기간에 유발된 4대 사화로 400~500여명의 선비들이 사망하였다.
마지막 을사사화(1545) 이후에 40년이 지난 선조 22년에 기축옥사(1589)가 유발되었다. 정여립이 모반을 하였다는 고변으로 시작되어 3년 동안 연관된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이때 사망한 사람이 1,000여명이 넘어 4대 사화를 모두 합한 수보다도 더 많았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이다. 당시 서인으로 우의정이었던 정철은 피도 눈물도 없어 별명이 ‘동인백정’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고문과 참수를 주도하였고, 심지어 10살 아이까지 죽였다고 기록되었다. 이 사건으로 비판, 견제,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룰이 깨졌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원한이 생겼다. 이후로 정세를 잡는 쪽이 반대편을 유혈 숙청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정치권은 대립관계에서 ‘밀리면 죽는다’는 개념이 만들어졌고,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서인이 득세하였다. 정조 사망 후 조선 후기는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몇 개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유지되다가 조선은 멸망하였다. 세도 정치 시절에 권세가문에 반대하면 왕도 살아남기 어려웠으며, 반대하거나 대항하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조선시대 전반과 건국 후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돌아보면,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은 서인이 동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기축옥사’다. 물론 선조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정철을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고, 다시 광해군 세자 책봉사건을 기회로 정철과 서인들을 숙청하는 등으로 이용하였다. 선조는 왕권강화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인재를 숙청하였고, 결국 자신은 임진왜란에 저항도 못하고 의주까지 도망가는 치욕을 겪은 것도 자업자득이다. 그 왕에 그 신하가 선조에 정철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지만, 만약 그가 그렇게 잔인하게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 풍토가 지금처럼 ‘밀리면 죽는다’로 되지 않고 공존과 타협이 있지 않았을까. 경멸 받고 저열한 정치인의 모습이 아니고, 이황처럼 품위 있고 존경받는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
거대 야당을 잡겠다고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의 모습, 탄핵 투표에 집단으로 퇴장하는 여당 모습, 세도정치 시절 권문세가처럼 국회권력을 쥐고 마구 휘두르는 야당 모습,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순간순간 모든 모습들이 조선시대 축소판으로 보인다. 어디에도 공존과 타협이 없다. 기축옥사 이후에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밀리면 죽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참 명제라고 착각하면서 지내온 정치 풍토가 436년이다. 400여년이 넘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슬프게도 아직도 이 땅의 정치 풍토는 변함이 없다.
조선시대 사극을 현재 뉴스에서 그대로 보는 느낌이다. 왕이라 착각하는 대통령, 권문세가처럼 국회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거대 야당, 논리도 이유도 없이 반대에 반대만 하는 여당 모습은 장례 날짜를 두고 수년을 싸움하던 조선 망국 시절과 너무도 같다. 반복되는 역사가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