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찾아온 우연한 기회
대학시절부터 최재호 원장은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학업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됐다. 개원의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봉사’에 대한 열망은 마음속 한구석에 있을뿐,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해야하는 것도 많고 신경 쓸 일이 많다는 핑계도 한몫했다.
그렇게 평범한 개원의 생활을 하던 최재호 원장에게 봉사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본인 스스로 ‘큰사고’를 당하면서 예기치않게 다가왔다.
“그때는 너무 크게 다쳐서 진료를 못하게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큰 후유증 없이 잘 나았고 치과의사가 되고 진료를 하는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이 회복된 이후 최재호 원장은 가장 가까이 있는 성가복지병원을 찾았다. 성가복지병원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위한 병원’을 모토로 어려운 이웃에게 정부보조금 없이 후원금과 봉사자의 도움으로만 운영되는 무료병원이다. 최 원장은 성가복지병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도움의 손길을 전하기 시작했다.
봉사의 멘토를 만나다
봉사활동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가족이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봉사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부인이었고 봉사활동으로 가족과의 시간이 줄어들어도 싫은 내색 한번하지 않았다.
봉사현장에서 그의 멘토가 되어준 변영남 원장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1991년부터 성가복지병원 치과진료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변영남 원장은 최재호 원장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됐다.
“사실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시작은 했지만 초보봉사자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변영남 원장님이 20년 넘게 봉사생활을 하시면서 느끼신 마음가짐을 저에게 이야기 해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제가 계속해서 봉사를 하고 이렇게 봉사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원장님 덕분이죠”
최재호 원장은 변영남 원장이 봉사팀장으로 있는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도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봉사를 하고 있다.
한번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보기 위해서 온 몽골아이가 치료를 받기 위해 센터를 방문했다.
구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아이는 다른 곳에서 한번 치료를 받은 상태였고 처음 경험한 치과진료에 겁을 먹고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한국에 왔을 때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던 엄마는 계속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엄마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린 최 원장은 함께 아이를 설득해 치료를 받게 했다.
“아이가 다시 돌아가야 할 몽골 현지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고려해 적극 설득에 나섰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살피다 보면 이런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다
최재호 원장은 얼마 전 네팔로 진료봉사를 다녀왔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5시간 떨어져있어 네팔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다딩으로 8일간의 해외봉사를 떠났다. 한국의 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열악한 환경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으로 진료가 중단되기도 했다.
잦은 정전에 대비해 유니트체어는 안정적인 위치로 고정시키고 랜턴을 비춰가면서 진료를 했다. 장비와 재료, 열악한 주위 여건으로 보철치료가 아닌 발치와 레진치료가 주를 이뤘다.
“완벽한 치료를 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우선 시급한 치료라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현재의 고통을 벗어 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완벽한 진료가 아니라 지금의 기본적인 진료이기 때문이에요. 도움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기본적이고 부족하더라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네팔에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최재호 원장은 봉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지 않는다고 뭐라 하는 이는 없지만 줍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치과의사라는 재능이 있는 만큼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닐까?”
최재호 원장은 변영남 원장이 이야기 해준 “사해가 죽은 이유는 들어오는 곳만 있고 나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를 봉사 신념으로 삼고 기회가 주어지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이 길을 함께 가고 싶다고 전했다.
김희수 기자/G@s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