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은 말복이었다. 3복 날의 마지막 복날이다. 복날은 한여름에 경(庚)자가 들어오는 날을 복날이라 하였다. 따라서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3번이 있다. 어찌 한창 더운 여름날에 유독 복날만 더울 것인가. 이는 아마도 지치기 쉬운 날씨에 10일에 한 번은 꼭 잘 먹으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입추가 지나니 한낮 더위의 기승은 여전하지만 열대야 현상이 사라지고 새벽 공기에 찬 기운이 돈다. 다시 한 번 자연의 순환법칙을 이해한다. 치과에까지 타격을 입혔던 메르스도 그렇게 지나갔다.
시작된 것은 끝이 있고 그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음이 사계절의 의미이고 자연계의 순환법칙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외형적인 몸이 그렇고 마음 또한 같다. 필자 또한 그런 변화를 느낀다. 50세가 넘으니 근육량이 줄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긴다. 오래 사용한 기계들을 기름칠하고 살살 사용하라는 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지하철을 타고 컴퓨터 앞의 의자를 치웠다. 최대한 앉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세상의 이치가 진행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출 수 있는 것도 이치이다. 물이 경사가 심하면 빨리 흐르고 경사가 완만하면 천천히 흐르는 것과 같다. 마음에도 변화가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과의사가 천직이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던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까지 느껴지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줄 아는 것을 하면서 먹고 산다는 것이 고마움’이라는 것을 느끼며 예전 선배님의 말씀이 이제야 가슴에 전달되어 온다. 이 또한 가을이 오면 여름의 더위가 꺾이듯 젊은 날의 생각이 나이 들면서 변화가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만물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여가는 것이 이치이다. 그런데 이 이치를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이 하나가 있다. 인간의 마음이다.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은 멈출 수도 있고 역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는 말로 마음을 강조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사랑과 자유의지로 표현하였다.
사람은 자라면서 성격이 완성된다. 급하거나 느리거나, 혹은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으로 표현된다. 성격은 한옥이나 양옥처럼 이미 만들어진 마음의 형태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격이 급격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노력에 의하여 성품을 바꿀 수 있다. 수행을 하고 정진하면 마음의 품격이 올라가고 그 끝까지 도달한 분들을 성현이나 성인이라고 한다. 반면에 인성이 무너진 사람들은 성품이 하락하여 범죄자나 파렴치한 혹은 악인이 될 수 있다. 물이 흐르다가 고이면 썩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바꾸기 어려운 성격은 놔두고 성품을 바꿔야 한다. 마음은 수양에 의하여 배양하지 않으면 멈추어버리거나 후퇴된다. 종종 고지식하거나 옹고집의 나이든 노인들을 자주 목격하는 이유이다.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나이가 들면서 변하지 않고 멈추어있다면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스스로 ‘예전엔’, ‘소싯적에 나는’, ‘내가 너 만할 때는’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면 상대방은 이미 스스로를 고지식하고 옹고집장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대화를 하면서 귀를 닫았을 것이다.
특히 자녀들과의 대화였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비록 자녀는 부모들의 유전자로 태어났지만 분신은 아니다. 이는 부모 본인이더라도 지금의 자식들의 환경이라면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고, 부모가 비난하던 자식들과 같거나 못한 행동을 할 가능성도 높다. 같은 종자씨라고 하더라도 어떤 땅에 뿌려졌는가에 따라서 수확량에 큰 차이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음이라는 밭에 성품이라는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야만 좋은 성품이 자랄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잘 자란 성품의 나무 밑에서 자식들이나 주변 이들이 편하게 기대고 쉴 수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혼란하고 복잡한 때일수록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뿌려진 성품의 씨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잘 가꾸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