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경의선을 타고 쉽게 갈 수 있는 양평까지는 수도 없이 자전거 여행을 했으나, 이번에는 서울에서 좀 거리가 있어 자주 가보지 못했던 여주 들판을 라이딩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을 떠나 시골의 자연을 접하고 토요일은 일요일을 위해 의정부까지 50㎞의 워밍업훈련을 하는 것은 이미 필자에게 습관이 됐다.
2016년 11월 6일, 전국일주 자전거여행의 구간으로만 스쳐지나갔던 여주, 강천을 이제 테마라이딩으로 삼아 샅샅이 훑기로 하였다. 다행히 2016년 9월 24일, 경강선의 일부가 개통돼 판교에서 여주까지 갈 수 있게 됐다. 우리 7명의 대원들은 경강선의 중간역인 이매역에서 모여, 경강선으로 여주까지 전철을 이용했다. 여주역에 내린 우리는 준비운동과 코스브리핑 후 50㎞의 여주일대 라이딩에 나선다. 오늘은 경강선 개통이후 처음 가는 코스가 될 것이며 여주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순방하게 될 것이다.
여주는 경기도 동남부에 있으며 이천과 함께, 도자기와 쌀의 고장이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 이외에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고 조금 먼 거리에 있어 발전이 더디게 진행됐다. 이제 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해 개통되는 경강선의 영향으로 많은 발전이 기대되는 고장이 됐다.
여주의 유래는 이러하다. 여주군청에서 신륵사로 가기 위해 여주대교를 건너기 전 우측에 영월공원이 있는 조그마한 산이 있다. 남한강이 산 밑을 따라 흐르고 그 산기슭 자락에 여주 8경인 바위절벽이 있다. 이 바위에 ‘마암(馬巖)’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주의 대표적인 성씨인 여주 민씨(驪州閔氏)의 시조가 이 바위구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또 신라 경덕왕 때 이 바위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따라 고을이름을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쳤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여주의 관광지로는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신륵사, 명성황후생가, 파사성, 이포보, 여주보, 강천섬, 불상이 많은 모수원 등이 있다. 여주의 특산물로는 쌀과 밤고구마, 도자기, 탑참외, 찰옥수수, 땅콩 등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여주의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그리며 라이딩을 하게 될 것이다. 8시에 만난 관계로 모두들 아침을 먹지 않고 온 것 같았다. 전철 속에서 바라보았던 여주의 모습은 돌, 농 복합도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에는 즐비한 아파트군, 또 한편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논의 모습, 추수가 끝난 논에는 까마귀만 날고 있었다.
여주역 9시 30분, 우리는 여주여행을 위한 페달을 밟는다. 우리는 우선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을 가기위해 소양천을 따라 달린다. 배에서는 꼬르륵 허기가 엄습한다. 안되겠다 싶어 가까운 해장국 집을 들렸다. 이른 아침 식사는 해장국이 제격이다. 모두들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비운다. 라이딩을 위해 잠깐의 휴식 후에 세종대왕의 릉인 영릉(英陵)으로 향한다. 영릉로를 따라 20여분을 달리니, 세종대왕릉에 도착했다.
10시가 조금 넘은 아침, 이슬이 나뭇잎에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영릉(세종대왕릉)은 원래 경기도 헌릉의 서쪽, 지금 서울 내곡동에 있었으나 469년 예종 때 이곳으로 이장했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왕후인 소헌황후의 합장릉이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왕으로 태종의 셋째아들(충령)이었으며 1418년~1450년간 33년간 재위에 있었다. 백성을 사랑한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 할 수도 없겠지만 대왕의 백성에 대한 근본생각은 민본(民本), 위민(爲民), 애민(愛民)에 있다. 이 사상은 바로 민주주의의 원천이다.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1450년 5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시호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호대왕이고, 묘호는 세종이며, 능호는 영릉(英陵), 능은 울창한 숲속에 반듯이 자리하고 있다. 영릉(英陵)에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 달리니 인근에 효종대왕릉과 민선왕후 장씨의 쌍릉이 있었다. 세종대왕릉은 많은 관광객이 붐볐으나 효종대왕 영릉(寧陵)은 한산했다. 병자호란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간 인질로 간 봉림대군(효종),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 다음 왕위에 오른 효종! 청나라에 대한 굴욕을 씻고자 북벌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재위 10년만에 승하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남한강변을 달렸다. 남한강에는 가창오리를 비롯한 오리떼가 떼를 지어 날고, 나선형 나무데크를 달리면 영월공원이 나타난다. 조그만 공원 그 정상에는 영월루가 있어 우리는 여기서 남한강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이 산 밑에 보물인 두 개의 3층 석탑이 있다고 한다.
남한강변에 여주팔경인 절벽바위가 있는데 마암이라 하고,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된 황마와 여마가 솟아났다고 한다. 여주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강변을 달리면 여주 박물관과 황포돛배 나루터가 보인다. 강 위에 떠있는 황포돛배는 그 옛날 조선시대를 연상케 하는 듯 유유히 떠있어 아름답기가 그지없었다. 조금 더 가니 신륵사가 보인다. 여주 봉미산 자락에 지어진 사찰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는 200여 칸의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영릉원찰로 삼아 보은사로 불렸고, 고려 고종 때 사나운 용이 나타나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자 순해져서 신력(神力)으로 제압 했다 해서 신륵사(神勒寺)가 됐다는 전설도 있다. 신륵사 경내의 강월헌에 오르니 남한강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관광객들이 탄 백조유람선은 낭만적이고 평화로웠다. 신륵사 후문을 통해 강문, 강천로로 달리니 강천보에 닿았다. 황포돛배를 형상화한 강천보, 한강문학관, 수변공원과 함께 남한강을 수놓고 있었다. 야간조명이 켜지면 강천보는 환상의 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우리는 강천보를 지나 마지막 목적지 명성황후 생가를 향했다. 생가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고즈넉이 안겨 있었다.
기념관은 작은 연못과 팔각정자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국정 주도권 다툼을 하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때 물러났던 황후는 1895년 음력 8월20일 을미사변 때 일본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홍릉에 안장됐다.
황후는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한 여인이었다. 우리는 명성황후의 애달픈 역사를 뒤로하고 여주역을 향했다. 50㎞의 8시간의 라이딩이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