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9시 KTX를 타기 위해 알람을 맞춰 평소보다 한 시간 여나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불가능했을 대구 당일치기 투어, 교통의 발달로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음을 몸소 느끼는 중이다. 대구는 늘 고향, 부산을 갈 때 거쳐 지나가는 도시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목적지다.
대구는 조선시대 경상도 감영의 소재지로 오랫동안 영남의 중심도시로 발전해 왔다. 개화기 이후 1899년 달성학교(達城學校)를 시작으로 초등교육기관이 생기고 계성학교(啓聖學校), 신명학교(信明學校) 등 여러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이 생겨 일찍이 교육•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화기 시절 대도시였던 대구는 조선의 선교와 근대화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온 까닭에 오래된 성당, 교회 등 선교사와 관련된 유적 등이 많았다. 다행히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전선 안쪽에 대구가 위치한 관계로 이러한 근대 유물•유적들이 전쟁의 화마로부터 벗어나 큰 손상 없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한때 과거의 중심가였던 대구 중구의 구시가지는 산업화 이후의 도시 팽창에 따라 활기를 잃었으나 근대화의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덕분에 최근에 새로운 관광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대구 근대골목은 경상감영달성길, 근대문화골목, 패션한방길, 삼덕봉산문화길, 남산 100년 향수길 등 총 다섯 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중 방문객에게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을 중심으로 제1코스 일부와 김광석 길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대구역에 도착하면 지하철을 타고 반월당역에 내려 관광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반월당역이 코스의 중간지점이라 차라리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909번 버스를 타고 엘디스리젠트 호텔 앞에 내려 청라언덕부터 관광을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청라언덕은 옛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어 동산이라 불리었는데, 100여 년 전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더위를 피하고자 심은 담쟁이 넝쿨이 벽돌집을 휘감아 온통 푸른빛을 띠면서 청라(푸른 담쟁이)언덕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인근 신명학교에 다니던 짝사랑한 여학생 얘기를 듣고 이은상 선생이 쓴 시에 박태준 선생이 직접 곡을 붙여 1922년에 만든 ‘동무생각’이란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한층 더 익숙하다.
이 언덕 위에 지금도 남아있는 과거 선교사의 세 주택은 각각 선교박물관(스위츠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의료박물관(챔니스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5호), 교육역사박물관(블레어 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6호)으로 사용되며 100여 년에 걸친 대구지역의 선교•의료•교육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899년 이곳 동산에 세워진 영남 지방 최초의 서양식 진료소인 제중원(濟衆院)은 동산기독병원(東山基督病院)을 거쳐 현재의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거듭났다.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3•1 만세운동 길’이다. 이 길은 1919년 3월 8일 인근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세운동 집결지인 옛 서문시장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3•1 운동의 정신을 후세에 기리고자 길 이름이 지어 졌으며, 이후 90개의 계단이 만들어져 ‘90계단’이라 불리기도 한다.
계산성당은 1886년 대구지역 선교 활동을 위해 부임한 로베르 신부가 지금의 계산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899년 한국식의 목조 십자형 건물을 지었으나 40여일 만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재건축에 착수하여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902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이 완성되었다. 이 건물은 영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1900년대 초기의 건축물이다. 현재 천주교 대구대교구 대주교의 주교좌성당이다.
성당을 나와 좌측으로 100여m를 가다보면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이상화와 서상돈의 고택을 볼 수 있다. 두 집은 도심의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있었으나, 시민들의 노력과 후원으로 보존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상화 고택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항일시인 이상화가 말년에 살았던 집이다. 건강악화로 1943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품활동을 했지만, 이상화의 시가 조선인에게 항일의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일제가 원고를 모두 압수해 생전에 시집 하나 발간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인으로 남게 되었다. 마당 한켠에는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역천’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오가는 이로 하여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상화 고택을 나오면 바로 앞에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꿈꿨던 대구 출신의 민족 자산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서상돈 선생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진 빚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운동은 초기에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던 그의 노력은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 사회운동의 모범으로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뽕나무 골목과 교남 YMCA를 지나면 제일교회를 만날 수 있다. 제일교회는 1893년 미국 북장로교에 의해 경북지방에 처음으로 생긴 개신교 교회로 처음 이름은 남성정교회였다. 1933년에 붉은색 벽돌로 직사각형 모양의 교회당이 새로 지어지며 이름을 제일교회로 바꾸었고, 1937년 중앙현관 오른쪽에 종탑이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됐다.
과거 선교사들이 이 교회를 중심으로 근대적 의료(제중원) 및 교육(계성학교, 신명학교 등) 등을 전파했던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곳이다. 약령시장을 지나 대구 화교협회와 화교 소학교까지가 2코스의 끝이나 국채보상로 길 건너 중부경찰서 앞의 대구 근대역사관과 경상감영공원까지 한꺼번에 쭉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대구 근대역사관은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 대한 금융지배와 식민지 수탈의 상징으로 악명이 높았던 옛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된 서양풍의 건물로, 해방 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을 거쳐 2011년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1층 상설전시실과 2층 기획전시실, 체험학습실, 문화강좌실 등을 갖추고 있다. 역사관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대구지역의 생활, 풍습, 교육, 문화 등을 모형과 전시물, 영상 등으로 실감나게 전해준다.
역사관을 나오면 바로 오른쪽에 경상감영공원이 위치해 있는데 조선 선조 때 경상감영이 설치된 곳으로,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도청사가 소재하기도 했다. 경상북도청이 이전된 후인 1970년 옛 건물을 중심으로 공원 정문과 분수, 산책로 등을 보완하여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개장하였다. 이후 1997년 경관을 해치는 담장을 허물고 공원 전체를 새로이 단장하고, 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 등을 역사문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게 되며 공원 명칭을 경상감영공원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현재 공원 내에는 경상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과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 그리고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등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마지막 코스인 김광석 길
사실 이 곳을 소개해야하나 하는 개인적 고민을 하기도 했다. 김광석은 1964년 대구 방천시장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 서울 창신동으로 이사와 1996년 서른셋의 나이로 급사하기까지 이곳과의 인연은 없다.
2010년 11월 그가 태어난 방천시장 인근 신천 둑방길에 그를 기리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되어 350m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나는 잘 포장된 이미지를 이용한 먹자골목이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촉촉이 가을비 내리는 저녁, 동인동 골목에서 매운갈비찜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대구 당일치기 투어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