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듯이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이는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해도 하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이다. 2000여 년 전 맹자가 한 이야기가 아직도 우리 곁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은 그가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세상사람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의사들에게는 늘 환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며, 사장들에게는 늘 부하직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하고, 직원들에게는 고객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서로의 입장이 실제로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면 생각만으로 입장을 바꿔보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이 될 정도로 그 차이는 클 것이다.
백인이 흑인분장을 하고 실제 흑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한 이야기를 적은 ‘Black Like me’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역지사지가 실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역지사지의 첫 번째는 소통(communication)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의사의 80% 가까이가 18초 이내에 환자의 말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병원에 온 이유조차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과연 우리는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것일까? 진정한 의사의 첫 걸음은 환자와의 소통에서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역자사지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환자가 좋아하는 의사일 것이다.
역지사지의 두 번째는 배려(Consideration)이다. 배려는 상대를 이해하고 또 존중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매일 하는 반복적인 일이고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환자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처음 겪는 상황이다.
그러한 환자의 마음과 의문점들을 이해하고 배려해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료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환자에게 얼마나 많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찮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자.
역지사지의 마지막은 공정(Fair)이다. 최근 들어 한 식당에서 임산부를 종업원이 폭행했다든가, 음식점에서 한 손님이 아이의 얼굴에 뜨거운 국물을 쏟았다든가 하는 식의 마녀사냥 기사들이 한동안 인터넷을 달구었다.
사실 확인 후에는 진실을 그와 달랐지만 이와 같이 한 쪽의 이야기만을 듣고 다른 쪽을 매도하는 불공정한 일들은 우리 곁에서 언제나 일어난다.
불법네트워크 치과에 관련된 수많은 논란 속에서 가해진 수많은 칼날들 중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던 치과의사 후배들을 향했던 배려 없는 칼날들이 부디 그들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해본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은 상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상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며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밤중에 애가 울어도 일어나지 않는 아내를 보며 배려심이 없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정작 자신은 힘들게 진료하고 온 사람이고 또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상자 안의 사람이다.
치과계를 바꾸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치과에 대한 비난이나 동료치과의사에 대한 질책과 같이 상대에 대한 변화의 촉구가 아닌 나 스스로의 변화와 나 스스로의 선택이 아닐까?
상자 안에서 밖을 향해 손가락질 하지 말고 나부터 상자 밖으로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