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 시작되면서 경복궁이 지어지고 인왕산 자하문으로부터 청계천이 흘러내리는 곳에 형성된 서촌마을. 예전에는 서촌이라 불리지 않았으며 청계천에서 바라보면 솟아있는 곳에 마을이 있어 웃대 또는 상촌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금천교가 있어 금천시장이라 불렸지만, 세종이 태어난 곳이 기에 이제는 서촌 세종마을거리라 불립니다.
조선시대부터 근대 격변기까지 이어진 서촌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듣기위해 출발해봅니다. 유럽 각지에 가면 이야기와 함께 들으며 투어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야기가 있는 투어를 많이 했는데, 50년을 살아온 서울에서 그런 투어를 한다니 이상하면서 설레기도 했습니다.
제일 먼저 온 곳은 통의동 ‘백송’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백송 중 가장 크고 아름다워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990년 7월 태풍에 쓰러지면서 고사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그 씨로 키운 백송이 그 곁을 지키며 3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촌의 유래에 대해 들었습니다.조선 개국 후 왕족들이 살던 곳으로 세종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왕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불타고 왕궁을 창덕궁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있던 왕족과 사대부들은 창덕궁과 가까운 북촌 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며 이곳에 중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예술과 문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 이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조선총독부와는 지척이고 조선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지어지면서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아직도 적산가옥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백송 뒤쪽으로는 추사 김정희가 살던 생가터가 있다고 합니다.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딸인 공주와 결혼하면서 왕족이 되었고 영조는 이 터에 집을 지어 하사했다고 하며, 그 이후 김정희가 이곳에 살았다고 합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 두번째 장소인 ‘보안여관’에 도착했습니다. 보안여관은 1936년에 지어진 여관이며,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시인부락이 만들어진 곳으로 근대문학의 발상지라 할 수 있습니다. 2004년까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머무르던 곳입니다.
현재는 구관과 신관을 이어 보안1942라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안여관의 원주인이 원래의 간판을 철거하지 않도록 당부하였고 아직도 그 간판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국민대가 최초로 설립되었던 곳을 지나 ‘막집’에 다다랐습니다. 막집은 조병수 건축가가 옛 한옥과 양옥을 합쳐서 만든 공간입니다. 옛 것을 무조건 부수지 않고 보존하며 현재와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곳이라 합니다. 다 부서져가는 과거의 벽에 현재 유리로 새로이 벽을 만들어 벽체를 보존한 것은 멋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내부는 전시의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한옥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길 건너 한 켠에는 우리나라 토속 종교인 계옴마루 총령경 세계정교가 나온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뤘다고하는데 이곳의 땅의 기운이 범상치 않은가 봅니다.
길을 건너 다음 목적지는 이상의 집입니다. 이곳에서 이상은 3세부터 약 20년간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으로, 절친인 구본웅으로부터 오얏나무(李)로 된 화구 상자(箱)를 받아 그 필명을 이상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화한옥이라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는 노천명 가옥입니다. 격변기에 노천명이라는 한 여인이 홀로 격변의 시대를 버티다 결국은 넘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해설사로부터 들으면서 한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올라오네요.
청전 이상범 화백의 생가에서 바쁜 걸음을 잠시 쉬어갑니다. 이상범 화백은 한국 현대 산수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청전양식’이라 불리는 독창적 화풍을 완성했습니다. 옆에 양옥은 화실로, 그리고 한옥은 가옥으로 사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ㄷ’자형의 한옥은 내부구조를 둘러볼 수 있도록 잘 꾸며 놓았습니다. 추억의 브라운관 테레비도 볼 수 있습니다(이런 TV는 ‘테레비’라 해야 더 어울립니다).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에 모여 살기 시작한 일본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현대적 시장이었고 지금은 엽전도시락과 기름떡볶이가 유명하다고 합니다.
표지석으로 남아있는 ‘송석원’의 터입니다. 17세기 이후 중인들이 모여 문학모임을 만들었고 시사(詩社)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큰 시사 중 하나가 천수경의 호를 따서 만든 송석원 시사였습니다.
송석원 시사는 사대부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조선사회에서 중인들이 중심이 된 위향문학이 등장하게 되는데, 거기에 큰 역할을 하게됩니다. 매일같이 옥류동 계곡의 송석원에서 모여 중인의 한계에 대한 설움들을 이야기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이후 친일파의 괴수 중 한명인 윤덕영이 축적한 부로 옥인동 일대의 땅을 사들였고, 송석원 터에 민영환이 가져온 프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와 독일에서 들여온 건축자재를 이용해 프랑스식 저택을 만들고 송석원 또는 벽수산장이라 불렀습니다.
벽수산장은 불타 없어졌지만 아직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양쪽 돌 기둥은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는 철문을 지지하던 기둥이라고 하며, 안쪽에 있는 절반만 남은 아치형 벽돌은 사람이 들어가는 입구였다고 합니다.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집을 지어줬는데, 그 집이 박노수 가옥을 거쳐 현재 박노수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지어졌음에도 지금 보아도 멋스러운 집입니다.
윤동주가 잠시 머물렀다는 하숙집터를 지나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인왕산 치마바위가 바라보이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입니다. 수성동 계곡은 안평대군이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별장을 지어 시와 그림을 즐겼던 곳이라고 전해집니다.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수성동 그림으로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경관을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면서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이라는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가 기린교입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수성동과 옥류동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합류하는 곳에 기린교가 있고, 그곳에서 청계천까지 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수성동 계곡 살리기로 계곡을 복원하며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을 발견했고, 그 돌로 기린교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서촌은 조선 초기에 왕족들이 지내다가 임진왜란 이후 시화를 사랑하는 중인들의 거주지로, 다시 일제 강점기에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풍류의 중심이었습니다. 지금은 먹거리 중심으로만 알고 있다가, 남겨진 흔적들을 거쳐가면서 그 사람들의 풍류와 멋, 그리고 고뇌,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네요. 시간에 쫓겨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곳들을 다시 시간을 내어 찬찬히 둘러보며 예전의 멋과 아픔에 귀를 기울여봐야겠습니다.
▼글 / 엄찬용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