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TV프로그램 ‘미스트롯’을 시작으로 올해 ‘미스터트롯’까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중심에는 판소리를 전공하다가 트로트로 전향한 가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음악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판소리 창법으로 가요를 부른, 국립창극단에서 활동 중인 젊은 소리꾼도 있다.
그 웅장한 고음에 관객들이 전율하고 환호한다. 전공 서적에서만 보았던 옛 대가의 이름을 그룹명으로 삼아, 독특한 복장을 한 채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무대에서 <수궁가>의 대목인 ‘범 내려온다’를 후크(hook)로 읊조리기도 한다.
판소리가 이토록 여러 분야와 장르를 오가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이 언제였던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안방극장에서 판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고, 판소리를 하는 명창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명절 때면 소리꾼들이 등장하는 TV창극이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당시만 해도 국악방송이나 국악 전문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판소리가 대중매체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청자들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판소리는 ‘벽’도 함께 있었다. ‘전통 음악’이라는 자존심으로 세운 높고 견고한 벽은 대중적인 영역이 섞여드는 것도, 다른 장르와 협업하는 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창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리꾼이 가요를 부르거나 다른 영역으로 발을 넓히기라도 하면 ‘실력 없는 소리꾼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다른 장르나 기웃거리는’ 것으로 폄하하기 일쑤였다. 개그 프로그램에 이름난 명창이 등장했을 때나 촉망받던 소리꾼이 영화 <서편제>에 배우로 출연했던 당시 국악계에 불어닥친 엄청난 반향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판소리가 지금처럼 스스로 벽을 허물고 개방적이 된 것은 유래를 찾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무척 고무적이다. 판소리는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진한’이라는 충청도 출신 양반이 쓴 남도 여행기에서 발견된 것이 판소리 최초의 기록이지만, 실제 연행(演行)된 것은 그 이전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과정에서 종횡으로 뼈와 살이 붙어 지금에 이르렀다. 발생 당시에는 백성들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나라님 욕도 판소리로는 할 수 있었고, 탐관오리와 거만한 양반을 응징하는 것도 판소리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창자의 노래 속 인물에 동화되어 같이 울고 웃었다. 잠시 암담한 삶과 현실을 잊기도 하면서, 시쳇말로 ‘사이다를 들이켠’ 것처럼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다.
이렇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것, 대중의 공감을 사는 것이야말로 판소리의 매력이자 명맥을 유지해온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외부 문물이 유입되면서 판소리를 즐기는 형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인의 창자와 고수로만 구성되던 소리판에 입체창과 창극이라는 형태가 생겨났고, 악기까지 더해지면서 연극적인 요소가 강화됐다.
연행 장소 또한 사랑방에서 무대로 옮겨갔다. 이후 판소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시련을 겪었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사회는 빠르게 발전해갔지만, 판소리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더 이상 그 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건드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시대가 변할수록 즐길거리는 다양해졌고,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해갔으며, 소비하는 문화 역시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서양 음악에 비해 국악을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판소리는 어렵게 명맥을 이어왔다. 그 와중에 전통적인 가치와 보존만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까지 했다. 판소리가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동안 대중의 관심은 더욱 멀어져갔고, 점점 전문가의 영역이자 어려운 분야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아무리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고 나라에서 ‘판소리의 해’를 정해 관심을 호소해도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했으니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립되어 가던 판소리는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경계를 허물고 유연해지기 시작한 것일까? 우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을 통한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개개인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졌다. 특히 요즘 세대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익숙하고, 공급자이자 수요자로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관대하다. 판소리 창법을 터부시하거나 잘못된 발성 습관이라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국악을 베이스로 다양한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과연 이것이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누구도 선뜻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지금의 변화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일단 변화를 해야 발전이든 후퇴든 할 것 아니겠는가?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변화에 이어 다가올 또 다른 변화들을 위해 판소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귀천을 떠나 누구든 삶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삶에서 겪는 일련의 경험도, 느끼는 감정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런 감정들, 즉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노래하는 것이 판소리다. 보편을 노래하려면 고립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벽을 낮추고 다양하게 교류해야 한다. 또한 창작이 한순간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도록 전통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전통은 창작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화수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뒤이어 따라올 변화 앞에 온전히 또 다른 무언가를 내주면서도 전통이 전통으로서의 위상을 지킬 수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전통에 답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전통과 창작의 균형이 중요해진 시대다. 전통으로서의 가치는 지키되 스스로 고립되지 않고 다양하게 교류하는 것. 어렵지만 오늘날 판소리와 국악계가 해내야만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