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3일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전속력으로 뛰어 약수역에 도착했건만 간발의 차로 3호선 상행선을 놓치고 말았다. 오후 3시까지 구파발에 도착해야 하는데 토요일이라 배차간격이 길어서인지 다음차가 36분에나 도착한단다. 그럼 오후 3시5분은 되어야 구파발역 2번 출구에 도착할 수 있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열차에 올랐다. 그래도 지난 5월부터 토요일 진료를 오후 4시에서 오후 2시30분까지 하기로 바꿔서 이번 즐거운치과생활 편집위원회 산행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역시나 부지런한 편집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들과 사진작가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바로 뒤돌아가면 은평둘레길 제3코스인 이말산 묘역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구파발역을 출발해서 진관근린공원(이말산)과 하나고등학교를 거쳐 은평한옥마을에 이르는 약 2.7km의 코스인데, 우리는 한옥마을을 지나 진관사까지 가보기로 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더운 날씨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숨이 차올랐다. 다행히 그 다음 코스부터는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부드러운 이말산 흙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숲이 우거져 있어 그늘이 많아 생각보다 다닐 만했다.
오랜만에 자연을 접해서인지 우거진 수풀들의 종류가 궁금해졌다. 휴대폰 카메라로 식물 사진을 찍으면 즉시 그 종류를 알려주는 네이버 앱의 스마트 렌즈 기능을 알게 된 우리들은 “세상 살기 좋아졌구나” 하면서 이 나무, 저 나무를 찍어보며 걸어갔다. ‘이말산(莉茉山)’이라는 지명은 산에 말리화(茉莉花), 즉 자스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스민이 어디에 있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안목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말산에는 비문을 제대로 갖춘 궁녀의 묘가 남아 있어서인지 ‘궁녀’라는 테마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다(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도성으로부터 십 리 이내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다는데, 이말산은 바로 성저십리의 경계 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도성 서쪽의 대표적인 매장지로서 특히 내시, 궁녀,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의 묘가 집중돼 있다고 한다).
궁녀에 대한 여러 안내문 덕분에,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지며 각 처소에서 다양한 일들을 도맡아 했던 왕조시대 여성 공무원이자 전문직 여성들이었던 궁녀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었다. 궁녀의 자격, 궁녀의 계급을 비롯해 영조의 어머니였던 숙빈 최씨, 너무나도 유명한 장희빈 이야기 등이 표지판에 잘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을 모셨던 보모상궁 임씨의 묘가 이말산에 모셔져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여기저기 방치된 듯한 묘들도 많이 보였다. 후손들이 없는 내시나 궁녀들의 묘들은 결국 관리가 안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느덧 진관사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왔다. 살짝 오르막길이라 긴장했는데 곧 내리막길로 바뀌었고, 어느새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화강암 연봉들과 그 아래 자리잡은 은평한옥마을이 보였다. 올라갈 때는 힘들었지만, 남성미를 뿜어내는 북한산을 보니 해발 132.7m의 낮은 이말산은 엄마 품 같이 푸근한 산이었다고나 할까….
1시간 30분 정도의 산행 후 이말산을 내려오면 우측 뒤편에 자사고로 유명한 하나고등학교가 보이고, 큰 길가 횡단보도를 지나면 은평한옥마을이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것 느낌이 물씬 났다. 북촌이나 서촌의 전통한옥마을보다는 현대적인 분위기여서 살짝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한옥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게 하는 곳임에는 분명하다. 10여년 전 은평뉴타운 개발을 처음 시작할 때, 한옥마을 토지 분양이 되지 않아 분양가를 처음보다 훨씬 낮추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지금은 수십 억원을 호가한다는 얘기에 ‘한옥에 살면 불편할거야’라며 이솝우화 속 신 포도 여우가 되어버렸다.
원래는 은평한옥마을의 ‘팥동동’에서 팥칼국수를 먹고 지역명소인 ‘북한산 제빵소’에 들를 계획이었다. 직원들이 강추해준, 인스타에서 유명한 ‘1인1잔’이라는 카페에 들러 북한산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하고 싶기도 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생활방역지침을 지키기 위해 아쉽게도 계획을 수정했다. 마침 한옥역사박물관과 ‘셋이서 문학관’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휴관 중이기도 했다.
은평한옥마을에서 15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진관사가 나온다. 진관사는 북한산 서쪽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이다.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제8대 임금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객들로부터 자신을 여러 차례 구해준 진관대사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거점으로도 활용되는 등 독립운동사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됐는데, 다행히 보존되었던 칠성각(七星閣)에서 항일투사인 백초월 스님이 숨겨놓은 걸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신문자료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한옥마을에서 진관사로 가는 길목에 이 태극기에 대한 안내문과 비석을 볼 수 있다. ‘하마(下馬)’라는 표지석에 이어 극락교와 해탈문을 지나면, 작은 정원을 둘러싼 대웅전과 진관사의 전각들이 보인다. 우리는 홍제루 옆에 앉아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바라보며 한 템포 쉬어 가기로 했다. 작은 화단에 심어진 각양각색의 귀여운 꽃들을 사진으로 남기며.
저녁은 간단히 연신내 쪽에서 먹기로 하고 하나고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탔다. 15분 정도 걸려 도착한 연서시장에서 먹음직스러운 먹거리들을 구경하다가 들어간 족발집에서 맛있는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글안은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