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국가주도 의료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고찰’ 연구 보고서를 살펴보면, 18세기 독일은 국가 전역에 퍼진 전염병을 관리하기 위해 경찰이 위생행정을 장악하고 운영하는 ‘의사경찰’의 개념을 만들었다고 한다.
독일의 법체계를 따른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할 당시 이러한 ‘의사경찰’의 개념을 차용해 국가가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위생행정을 구현하는 ‘위생경찰’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위생’이라는 명분 아래 경찰에 의한 각종 통제와 단속 위주의 방역을 실시했다. 이러한 강압적 통제 기제는 국가권력이 개인 생활의 근저까치 침투하는 도구가 됐다.
일본 식민시대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통제는 그대로 이어졌다.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급속한 근대국가를 이뤄야 하는 권위주의 정부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의료인을 동원하는 것은 마치 매우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 의료법이 일제 잔재인 ‘조선의료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조항에서 드러난다. 단적인 예로 1962년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 온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는 의료법 상의 진료금지 조항이 있다.
진료거부금지 의무를 처음 규정한 1944년 8월 21일 제정된 ‘조선의료령’ 제10조에서부터 이어져 1951년 9월 25일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22조를 거쳐 현행 ‘의료법’ 제15조의 형태로 존속하고 있는 해당 조항은 구체적 내용은 소폭 변경됐지만 그 정당성에 관한 특별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히려 벌칙의 정도만 강화되고 있다.
진료거부 금지 조항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진료’라는 의료인의 직무 수행에 있어 직업윤리를 형벌로써 강제해 직업수행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프랑스, 영국 등 해외 선진국의 경우 ‘의사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진료거부가 가능하다. 진료거부 금지 의무위반이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일본에서조차 처벌 조항이 없다. 처벌까지 법령으로 규정된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 보고서는 “국가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의사와 의사집단을 자의적으로 쥐락펴락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남발이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의료제도는 국가 자원 중 상당한 부분을 소비하고 모든 국민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이 특정 정치집단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운영된다면, 그리고 전문가적 판단과 결정의 영역이 관치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공무원들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 부정적 결과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 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서울시치과의사회 헌법소송단이 제기한 헌법소원과 관련법 조항의 효력정지가처분소송이 진행 중임에도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위한 자료 제출을 하라고 통보하였다. 물론, 미제출 시 과태료 부과 또한 고지하였다. 거기에 더해 우리 국민의 주택, 차량 보유사항, 급여 진료내역 및 금융거래 등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소관법령인 비급여 보고에 관한 고시가 공포되지 않았음에도 비급여관리실을 만들어 국민의 비급여 진료내역을 확보하기를 벼르고 있다. 또한 얼마 전 기재부는 의료인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비급여 진료비 공개자료의 상업적 이용금지’를 무너뜨리는 발표를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국가주도 관치의료’의 고고한 역사는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듯 하다. 허준처럼 스스로를 희생하며 무상에 가까운 진료를 해야만 ‘의료인의 직업수행의 자유’는 지킬 수 있는 덕목이 되는 것으로 이 사회는 인정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내려온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가급적이면 우리 세대에서 바로잡아야 한다. 의료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가 직업의 형성과 수행에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율적인 의료시장 질서를 해치고, 나아가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비급여 관리대책을 바로잡아야 내일의 의료계가 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국민이 건강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