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지라는 카타르의 수도이자 도하에 생긴 방송국이다. 1996년에 생긴이름도 없는 아주 작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한 지역 케이블 방송국 정도였다. 그랬던 방송국이 지금은 중동의 CNN이라고 불린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주며 비행기의 테러로 무너졌다. 그리고 미국은 배후로 알카에다를 주목하고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중동에서의 취재가 쉽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서 오사마빈 라덴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인터뷰를 알자지라 방송에서 하면서 세계적인 방송으로 떠올랐다. 이라크전쟁 당시 미국방송을 포함한 전세계의 모든 방송들은 알자지라 방송으로부터 자료를 받아서 발표할 뿐이었다. 중동 뉴스의 모든 통로로 자리를 잡았고 특히 반미적 특성으로 대다수 중동 국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그런 알자지라 방송에서 한국의 자살을 다루었다. 알자지라 더 스트림은 한국과 미국 등의 전문가를 연결하여 40여분 정도 집중적인 기획보도를 진행,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높은 자살률에 대한 원인과 대안 등을 모색하였다. 알자지라는 3가지 정도를 핵심 사항으로 분석하였다. 첫째는 한국의 젊은이들 중 절반이 자살을 생
네덜란드의 한 교과서에 한국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함께 이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된 모범 사례 국가로 실렸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랐다. 그러나 네티즌의 댓글은 다양하다. 좋다는 글도 있었지만 선진국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팍팍하냐는 이야기도 많이 보였다. 아직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공과금만 남겨 놓고 자살한 세모녀 사건 등과 같이 일반적인 서민들의 경제생활은 힘들기만 하다. 특히 중산층이 붕괴되었다는 지금의 한국 현실은 네티즌이 선진국이란 단어를 공감할 만큼 녹록하지 않다.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는데 선진국이란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를 생각해본다. 선진국이란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이다. 국민소득이 대표적인 지표가 된다. 대략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에서 4만불 이상인 국가들이다.2013년 한국은 2만6,000불이었다. 아직 3만불에는 못 미치지만 잠재성장을 감안하여 나온 이야기이다. 또 정부에서는 4만불을 목표로 매진한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1인당 2만6,000불을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한가족당 10만불 즉 1억 정도이다. 한 가족이 한 달에 1,000만원 정도의 소득을 의미한다. 그 정도라면
오랜만에 둘째 누님이 구강검진을 위하여 치과에 내원하셨다. 그리고 의사들이 파업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이해시켜달라고 하셨다. 동생이 치과의사라서 의료계의 소식에 관심이 많은 누님께서 의사파업의 이유를 모르신다니 대부분의 국민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치과에 근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하게 아는 이들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원격진료와 영리법인이 지닌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원격진료는 대면진료의 반대적 의미이다. 대면진료는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즉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의료지식과 기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영혼을 지닌 사람(의사)이 신체나 마음에 질환을 지닌 사람(환자)을 치료하는 것이다. 치료에는 의사와 환자사이에 인간적인 신뢰와 라포 형성과 같은 정서적인 부분이 의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원격진료는 인간이 영혼을 지닌 사람이란 부분을 무시하고 오로지 암, 당뇨 같은 질환만을 기계적으로 보고 마치 자동차를 고치듯이 치료를 생각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철저한 유물론적인 개념으로 의료에서 휴머니즘을 제외시키는 정말 극악무도한 개념이다. 결국 원격진료를 원하는
우리 치과 건물의 1층에는 얼마 전까지 꽃집이 두 곳 있었다. 한 집은 생긴지 7년 정도 되었으나 허름한 집이었고 새로이 생긴 집은 2년 정도 되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집은 깔끔하고 멋진 인테리어를 하였다. 그러던 중 한 달 전에 허름한 꽃집이 개인사정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며칠 전이다.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 남아있는 꽃집 유리창에 A4용지 크기의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 ‘화분에 휴지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문구였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버리면 CCTV를 공개하겠다는 내용도 첨가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CCTV 화면을 출력해 50대 아주머니가 화분에 휴지를 버리는 장면을 유리창에 붙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또 다른 메모장이 유리창에 붙었다. ‘가져가신 화분 비용을 지불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였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밖에 내어 놓은 화분을 집어간 모양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가 흔히 있을 수 있는 듯 하지만 허름한 꽃집이 문을 닫기 전의 상태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허름한 꽃집은 개업하고 있는 동안 내내 상가 앞에 새로 나온 꽃이랑 화분들을 내어놓고 방치하였다. 물론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혹시 누가 집어가면 어쩌
새벽까지 소치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을 본 사람들이라면 김연아 선수의 은메달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심판들의 점수 채점은 정당성을 의심받았고 수많은 의혹과 불신을 유발시키며 그녀는 은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17살 선수는 기량에 의심을 받으며 금메달을 받았다. 일련의 사건을 표면적으로 보면 은메달을 받은 김연아 선수가 억울한 피해자이고 금메달을 받은 러시아 선수가 행운아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우선 김연아 선수를 생각해보자. 김연아 선수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선수이다. 그녀의 기량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의미는 2연패라는 것 외에는 금메달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의미 그 이상 도 아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불공정 판정 시비에 엮이게 되어 더욱 유명해지는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극단적으로 보았다.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게 하였다. 게다가 억울함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던 모습은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며 더욱 감동을 주었다. 마치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말하는 박지성 선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연아 선수는 금메달 이상
빅토르 안과 손기정 옹의 공통점은 한국인이지만 외국 국적으로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딴 인물이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손기정 옹은 타의에 의하여 국적을 상실하였으나 빅토르 안은 자의에 의하여 국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빅토르 안과 유승준은 자의에 의하여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런데 빅토르 안의 국적상실은 유승준과는 많이 다르다. 빅토르 안은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반면 유승준은 국민정서에 반하여 있다. 그럼 이 세 사람을 보는 국민들의 정서가 다른 이유를 살펴보자. 빅토르 안의 한국 이름은 안현수이다. 벤쿠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많은 불합리성과 불운을 겪으면서 본인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국적을 바꾸며 러시아로 귀화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고 한국빙상연맹이 잘못했음을 소치올림픽에서 실력으로 보여주었다. 미국의 한 신문에서는 ‘빅토르 안이 러시아 국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것은 마이클 조단이 쿠바 국기를 달고 경기하여 우승한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소치에서 비록 러시아 국기를 달고 우승하였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그에게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그 이유가
세상의 모든 것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모여서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가장 쉬운 이치이다. ‘세상’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한자어로는 世上이라고 하여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世相이라는 한자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풍습 따위에서 보이는 세상의 상태나 형편’이라고 한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로 일명 세태라고도 하기도 한다. 필자는 한마디로 ‘다양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世上에 나타나는 일들이 世相이니 결국 세상은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 여름날에 들에 핀 수많은 들꽃을 보면 이름 모를 꽃들까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가. 그런데 만약 한 종류의 꽃만으로 다 이루어져있다면 한 순간은 아름답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싫증나고 지루해진다. 결국 다양성이 다양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세상이 그러하듯이 사람도 다양하다. 지구 위에 어느 사람 한명도 똑같은 이가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외모적으로는 유사할 수 있으나 성격까지 비슷하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인간의 다양성 중에서 개개인의 성격의 다양성을 개성이
요즘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과 행보를 보면 예사롭지 않다. 정상에서 많이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독단적인 행태를 달린다. 심지어 일본 주미대사가 한 연설에서 미국에게 중국과 일본 중 양자택일을 하라는 막말까지 던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동해 표기를 일본해와 병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미국의 어떤 주지사에게 법안을 승인하면 일본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협박 편지를 보내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뒤에는 극우세력인 아베가 있다. 그럼 왜 한 동안 가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일본이 요즘 세계의 ‘꼴통’으로 되어가는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국가의 운영도 개개 사람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기에 사람의 심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일단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던 때는 일본이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때였다. 반면 일본이 최근과 같은 안하무인적인 극단적 우익의 모습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던 때부터 시작하여 급기야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부터이다. 후쿠시마 원전의 해결방안이 없다보니 급기야는 두 가지 방법을 택하였다. 특정비밀보호법을 제정하여 소문을 막고 한편으로는 과거 우리나라 독재정권도 많이 사용하던 방법으로 국민의 생각을 다른
이스라엘 통곡의 벽이 유명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 벽이 왜 유명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왜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기도를 드리며 통곡하는지를 모른다. 그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벽으로 아주 오래된 벽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으나 후에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고 헤로데스왕이 예수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런 비극을 지켜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되어 지금도 유대교의 성지인 것이다. 한편 이곳은 유대교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이슬람 성지이기도하다. 서로 융화될 수 없는 종교의 성지여서 통곡의 벽은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류에 사랑과 구원을 전하는 세계 종교의 성지가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의 상징이기도 한 모순을 보여주는 전형으로 이제는 ‘통곡의 벽’이 유명하다. 88올림픽 때의 공식 노래인 ‘손에 손잡고’에서 그 다음 가사가 ‘벽을 넘어서’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분쟁의 벽을 넘으라는 의미였다. 여기서 말하는 벽의 의미는 건축물의 벽
그동안 남녀 간의 차이는 수없이 이야기되어 왔다. 심지어 남녀 간의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한 제목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미국 펜실베니아의 Verma는 해부학적으로 여자와 남자의 뇌구조가 다르다는 결과를 발표하여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즉, 여자의 뇌는 좌·우측 뇌가 소통을 하여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반면 남자는 좌·우측 뇌가 소통하지 않아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자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이들 일에 참견을 할 수 있는 반면 남자들은 신문을 읽으면 아내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해부학적인 차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심리학에서는 남녀에 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론들이 있다.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면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여기에는 부모투자이론과 친자관계 가능성 이론이 있다. 부모투자이론은 여자가 남자에 비하여 부모로서의 투자를 많이 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즉 여자는 임신을 통하여 자신이 낳을 수 있는 자식이 제한되는 반면 남자는 그렇지 않기
요즘 10~20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50대인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청소년을 이해하고자 청소년지도학을 석사 전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대부분의 부모들이 겪고 있는 큰 가슴앓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10~20대 청소년들의 부모는 대개 40~50대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려운 일을 감수하고라도 해결하고 완수해야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의식이 있었다. 그런 생각들이 급기야는 기러기 아빠라는 극단적인 비정상적인 가정의 형태를 만들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지금의 10~20대의 청소년들이 성년이 되어서는 결코 기러기 아빠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다. 그들은 40~50대들이 생각하는 가치관의 우선순위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공부라는 결과를 위해 가족이 떨어져 사는 어려움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라면, 지금의 청소년들은 공부라는 결과보다는 같이 살 때의 가정의 행복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일과 쉬운 일이 그들에게는 반대적인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상반된 가치관의 차이가
갑오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엔 모두가 행복하고 편하기를 기원한다. 언제부터인가 행복이 삶의 화두가 되었기에 항상 행복하길 기원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 전과 눈을 뜨자마자 모두가 행복하길 기원한다. 물론 크게는 세계의 경제가 어렵고 인접 국가들 간의 알력이 쉽지 않고 북한문제도 그러하다. 이런 조건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어려운 환경이다.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이 자영업에 가장 크게 나타나니 치과를 포함한 모든 자영업이 힘들어질 것이다. 작게는 개개인에게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건강이나 심적으로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을게다. 그런데 이런 많은 일들을 누르고 이 시대에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인류가 탄생하고 어느 한 때라도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나를 반문하여 본다. 2000년 전에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 또한 정직하고 착한 백이숙제는 굶어서 죽고 욕심 많은 악인들이 권력과 권세로 잘 먹고 잘사는 세상에 대하여 한탄하며 그 문제를 고뇌하였다. 그리고 책 속에 인간과 역사의 모순을 기록하여 그 또한 자연의 한 모습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 2000
한해도 이제 보름 남짓 남았다. 항상 그러듯이 ‘다사다난’한 해가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필자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한번이라도 ‘다사다난’이란 말을 안 들어 본적이 없는 듯하다. 항상 매해가 다사하고 다난하였건만 올해의 ‘다사다난’는 유독 심한듯하다. 동대문시장에서는 건국 이래 처음 겪는 불황이란 말도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올해의 테마는 ‘힐링’이었다. 모두가 힘들고 지치다보니 ‘힐링’이란 말이 화두가 되었고 그것은 이해의 마지막에 “안녕하십니까”라는 모 대학 벽에 붙은 대자보에 실린 글귀한마디가 모두의 가슴에 울렸다. 어느 누구하나 안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안녕’이란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은 역사적으로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하룻밤을 자고 나면 죽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난밤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까?’란 의미였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밥은 먹었는지를 물어서 ‘식사하셨는지요?’를 묻는 것이 인사말이 된 것이다. 이렇듯이 안녕이란 역사적으로 아픔이 있는 단어가 다시 모두의 가슴에 이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대변하는 단어로 떠 오른 것이다. 결국 지금의 현실이 그 만큼 아프고 시리다는
1년 전 쯤 일 것이다. 20대 여성 환자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다. 반복되는 질문과 답변을 하다가 문득 필자가 “객관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라고 질문을 하자, 그녀는 “내가 돈을 내고 진료를 받으면 이 정도의 부당함과 기분이 나쁜 것은 감수하셔도 되지 않나요? 그리고 내가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나요?”라고 답변하였다. 필자의 일반적인 생각을 넘는 답변이었고 그 순간 한동안 모든 생각이 멈췄었다. 필자는 “아! 그렇군요”라고 답변하였다. 말한 환자도 본인이 좀 심했다고 느꼈는지 그냥 서로 차분하게 정리되고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필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 필자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알았고 생각의 시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도 알았다. 그 환자의 말을 통하여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자판기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았다. 커피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받고는 커피자판기에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녀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요즘은 모두가 의료를 상품 취급을 하니, 이 시점에서 의료라는 상품의 본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옷을 파는 장사꾼들과
요즘은 초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생, 심지어는 대학생의 입에서도 “엄마에게 물어보고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필자도 처음에는 이상하였으나 이젠 당연하게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 모습에 가끔씩 놀라곤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3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우리나라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해주어야하는 덕목을 넘어서 신앙과 같은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맹모가 살아 돌아와서 지금의 세태를 보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단지 3번 이사만 했을 뿐인데, 한국 엄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정성을 넘어 극성이라는 것이 이젠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니 말이다. 얼마 전 한 학회에서 만난 일본 교수가 일본의 어떤 TV에서 한국의 ‘기러기아빠’ 세태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된 것을 보았다고 전해주는 말을 들었다. 또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자주 거론한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국 엄마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대단한 것만은 사실이다. 심지어 요즘은 좋은 대학 입학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3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조차 떠돈다. 내용인 즉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