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지인 중에 ‘Free hearings’가 적힌 피켓을 들고 공원에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있다. 공원이나 홍대 앞에서 ‘Free hugs’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은 종종 접했다. 프리허그의 본래적 의미는 포옹을 통해 파편화되고 메마른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필자의 지인은 남의 말을 들어주는 목적으로 Free hearings를 시작하였다.
요즘 현대인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사회에 이미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SNS의 영향도 매우 크다. 요즘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동료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으나 모두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다. 동반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 것이 실례를 범하는 것이지만 이미 시대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릴 만큼 많이 변해 버렸다. 그 만큼 누군가와 집중해서 이야기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암시이기도하다. 이런 사회적인 행태에 반기를 들어 Free hearings를 몸소 보이려고 시작하였다.
심리학자 맥코넬은 64명의 대학생에게 33개의 성격카드를 주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카드를 선택하는 실험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성격성향도 같이 조사했는데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하였다. 이 실험에서 카드를 많이 선택한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타입이었다. 생각이 단순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 대하여 여러모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원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상처받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요즘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하여 위험한 행동도 감수하는 이유가 이런 ‘이해를 받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사람일수록 상담이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 욕구를 토해내야 하지만 현실은 이미 그것을 허락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가족 간에, 친구 간에, 동료 간에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상 모두가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의 스트레스까지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다. 누군가 우울해있다면 그는 ‘나는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고 누군가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라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처음에 가까운 이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대부분 시도한 대화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위로가 아닌 ‘조언을 가장한 충고’이다. 충고를 받으면 스트레스는 더욱 커지게 되고, 이후 한 두 번의 대화 시도에서 실패하고 나면 대화를 기피하고 스스로 고립화하여 우울증은 점점 심화된다.
최고의 위로는 ‘들어주는 것(Hearing)’이다. 누군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쳐주고 싶다면 적어도 그로부터 이야기를 3번 이상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충고나 조언이 아닌 반복해서 듣는 과정에서 스스로 모순성을 찾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통상 스스로의 모순성을 잘 파악하고 있지만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스트레스가 녹아내릴 만큼 충분히 말을 하고나면 자신의 잘못과 모순을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 동안 너무 빠르게 변화돼 오면서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사회가 급격하게 SNS시대로 진입하면서 개인이 타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위로받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상실하였다. 그나마 타인의 이야기는 들어주기 쉽지만 오히려 가족이나 연인 같이 가까운 이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주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줄 수만 있다면 상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이 스트레스의 원인 제공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변하기를 바란다면 충고나 조언을 버리고, 오로지 귀로는 듣기만 하고, 고개 끄덕거리기는 나이만큼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