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필자와 비슷한 연배의 어떤 분이 암 투병을 극복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본인은 아직도 뭐든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데 병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지금도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시는지요?” 자랑스러운 듯한 답변을 들었다. 이에 필자는 “그러시면 아마도 요즘 가까운 사람들이 매우 힘들어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아내 되시는 분이 “요즘 자녀들과 사이가 나빠져서 아들을 자력으로 고생해보라고 내보낸 일이 있었는데 용하시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가 예언가도 아니고 그런 것을 알 수 없지만 유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순 나이에 아직도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것은 살면서 큰 위기를 겪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물론 본인 입장에서는 다양한 위기가 있었고 그것을 잘 대처하는 능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필자 연배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노력하면 가능한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에 모든 분야에서 일손이 부족했고 어떤 일이든지 국내에서는 처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자도 없었다. 결국 과도한 욕심에 사기를 당하거나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 이상 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능력이었다고 착각을 하며 지금 사회에서 시작해도 가능할 것이란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면 필자는 어떻게 주변 사람들이 힘들 것을 알았을까? 간단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눈으로 본 것은 철저하게 믿는다. 즉 자신이 걸어온 꽃길(본인은 부정하겠지만)이 지금도 같은 길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해진다. 우선 자신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남을 인정하려는 생각보다는 무능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두 번째, 현시대에 대한 감각이 떨어진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넘치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그나마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셋째, 처음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은 모든 분야에 진입장벽이 높아 시작조차 하기 힘든 현실을 모른다. 넷째, 빠르게 변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얼마 전 치과의사 모임에서 이야기 중에 ‘쏘카’를 모르는 이가 70%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기성세대 생각이 자신감에 넘쳐 있다는 것은 아직 포용을 이해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세대는 자신감이 넘칠 때가 아니고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해 주어야 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포용 없는 눈으로 보면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다. 자식과 부딪치고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모 세대가 자신들이 살아온 길과 젊은 자식 세대 앞에 놓인 길이 전혀 다른 길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와 다르고, 경험과 환경이 다르다고 인정을 하는 순간 생각이 넓어진다. ‘내가 옳다’에서 ‘나와 다르다’로의 전환이다. 이때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상대를 이해하는 정도까지 생각이 넓어지면 그때 포용이 가능해진다. 포용하면 상대는 이해해주고 안아주는 세대와 동화된다. 이때가 통섭이다. 비로소 분쟁과 미움이 없어지고 마음의 평화가 올 수 있다. 내가 옳으면 남이 틀려야 하고, 내가 강하면 남이 상처받아야 한다. 내가 옳고 그름을 떠나면 상대를 비난하거나 비평할 일이 없다. 지금에 만족하면 내가 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에 만족하면 외적인 분쟁이 사라진다.
외적 요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진다. 만약 외부 요인으로 행복하지 않았다면 바로 행복해질 수 있다. 물론 외부 요인이 제거되어도 행복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욕망, 욕심, 바람 등과 같은 내적요인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 외적 요인만 해결하여도 반은 해결된다. 그 시작이 ‘내가 옳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너도 옳을 수 있다’, 즉 ‘나와 다르다’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다툼의 생각이 이해의 과정으로 전환되고, 그 이해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마음의 평화가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