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전 세계가 보고 있었던 아카데미상 시상식 실황 방송에서 미국 유명 흑인배우가 각본에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가, 행사를 진행하던 또 다른 흑인희극배우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달됐다. 언제부터인가 무대에 오르는 주인공은 요즘 말로 뭔가 임팩트 ‘쩌는’ 멘트로 좌중과 시청자들의 박장대소, 참신함, 의외의 느낌, 심지어는 물의라도 일으켜 대중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해야하는 선례 또는 유행이 만들어져 왔다.
비슷한 예로 여러 경로로 자신을 노출하는 유명인들이나 재벌인사의 특이한 거동(behavior)도 ‘의외’와 ‘서프라이즈’를 갈망하는 대중의 정서적 허기에 맞춰 차려진 밥상과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의 언행이 다소 상식과 보편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다 싶을 때, 대중은 열광하고 주인공의 ‘대중성’은 높이 평가되며 내내 이슈로 남아 당사자들의 ‘대중’ 여론주목에 도움이 되겠지만, 이러한 유행의 물결은 선을 넘어 방파제 너머로 종종 범람한다.
80억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며 비슷한 사건들이 수없이 반복되다 보면 다 그저 그렇고 별다른 느낌 없는 일들로 퇴색되어 갈 수밖에 없는 데다가, 개개인이 ‘매우’ 특별하고 누구나 노력 없이도 ‘당연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난 세기 에설런 연구소(Esalen Institute)發 ‘자존감 고양’류(類)의 현대미국식 교육사조가 수십년 만연해왔음을 이해하고, 이에 더해 대중문화콘텐츠의 본질은 오락이며, 그 오락은 평균적으로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지성과 정서를 기준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가설을 기억해보면, 위와 같은 해프닝의 단초와 귀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존재감이 없다’는 불안감은 새 세대의 고민이라고 한다. 고민은 시간을 충분히 주면 긴장과 압박으로 자라는 부정적인 요소로 평가되지만, 길게 보면 긴장과 압박은 문제의 본질에 당당히 맞서고 극복하게 함으로써 한 개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회이며, 필수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부분에 대해 노벨문학상(1964)의 주인공인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그 눈물겨운 긴장과 압박 속에서도 품위를 지켜내는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였으니, 그 자질의 이름을 ‘용기(勇氣)’라 하였다.
‘깃털 하나는 살아서 노래하는 새 한 마리’라며 깊은 사유의 글들을 남긴 멕시코의 문호이자 5~60년대 이데올로기의 오해와 충돌로 혼란스럽게 얼룩졌던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빛으로 평가받는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1914~1998)는 ‘지혜(智惠)는 불변에 있지도 변화에 있지도 않다. 그 둘이 대립하는(dialectic) 곳에 놓여있다’는 지혜에 대한 놀라운 정의를 남겼다.
우리 치과의사들에게 다가오는, 아니 이미 다가왔다 지나가버린지도 모를 사회적, 제도적, 학문적 변화의 요구에 우리가 가져야 할, 또는 가졌었어야 할 ‘지혜’로운 태도에 대한 기본과 ‘용기’있는 실천들의 당위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우리가 직(職)으로 선택하고 업(業)으로 행하는 우리의 일은 중학교 2학년 수준의 대중문화와 격(格)은 물론 조(調)조차도 닮아서는 아니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모두가 함께 배운 치의학을 통해 알고 있는 상식과 보편의 선을 넘어서도 아니되며, 지속성을 위해 다양성은 필수적인데, 빛바랜 교육사조의 유행과 같은 화려한 배에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올라타서도 아니된다. 불변과 변화 사이에서 보편성과 다양성을 반드시 함께 안고 가야 하는 그가 본 ‘지혜(智惠)’의 모습을, 파스(Paz)는 그의 아름다운 詩 속에서 이런 심상으로 그려준다.
‘물은 똑같이 흐르며 쉼 없이 말하지만, 절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선 넘기 게임’을 벌이는 이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본연의 모습과 처음의 위치를 묵묵히 지켜내는 대한민국 치과의사들은 더 깊은 지혜로 쉼 없이 흐르는 조용한 품위와 용기의 주인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