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치대 졸업, 치의학 박사, 前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 의장, 前 UN·NGO 밝은사회 한국본부 부총재, 前사회복지법인 분도와안나 개미꽃동산 대표이사, 박종수치과의원 원장. 박종수 원장을 수식할 수 있는 수식어나 지금까지 그가 받은 표창장을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평생을 봉사와 나눔의 자리에서 헌신하고 노력한 한 치과의사가 있다.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아름답고 숭고하게 만들었을까? 그의 여정을 함께 들여다보자.
아버지의 병과 함께 찾아온 지독한 가난의 시간들
박종수 원장의 가난은 그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찾아온 암과 함께 시작된다. 그전에도 물론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병환으로 퇴직하신 후 부모님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1년 동안 수술과 치료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이후 남겨진 자녀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한 가난을 경험하며, 학부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아이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삶을 살게된다. 박 원장은 그때 공부를 해서 가난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밤을 새우며 공부한 결과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지역의 명문 고교에 진학하게 되고 이후 지역 유지의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며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일생일대의 중대한 만남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입주한 가정의 가장인 대전시의사회 회장과의 만남이었다.
그 회장은 가끔 외국에 다녀오곤 했는데 어느 날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박 선생, 앞으로 치과의사가 좋은 직업이 될 거야. 미국 등 선진국의 추세야” 그리고 이것은 그가 치과의사로 진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60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합격하게 된다.
끝없는 절망의 시간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
무일푼으로 서울로 상경한 그는 서울에서도 한 가정의 입주 가정교사로 취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여 살고 있었다. 서울로 상경할 당시 시골의 부모님은 입학금은 마련해 주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졸업하고 그 후에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집의 형편에 혹여나 학업에 지장을 줄까 싶어 하신 말씀이었다.
서울로 상경한 지 만 3년이 지났을 무렵 집에 다니러 간 그는 아버지의 병이 재발했다는 소식과 함께 끝없이 기울어진 가산과 병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모시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는 서울의대 부속병원에서 조직 검사를 받아 본 결과 아버지의 병명은 악성 섬유육종으로 한쪽 팔과 늑골 일부까지 절단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대수술인 만큼 수술비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였고 서울대병원에서는 무료 수술이 어려워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전원한 후 극빈자 대상으로 무료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는 대학생까지 있는 집이 무슨 극빈자 대상이냐며 아버지를 수술자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후 그는 백방으로 아버지의 수술을 위해 뛰어다녔지만 병원 측의 입장은 완강했다.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병은 더욱 악화하였고 아이들에게 소홀해져서 가정교사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다음 학기 학비로 모아 놓은 등록금도 아버지 하숙비로 다 써버리고 모든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그때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했다고 한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간이 한 달여를 더 지나 아버지의 수술을 위해 매일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아간 지 9개월째 되는 날, 그는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학생! 끈질긴 친구로구먼, 부친을 위한 정성에 감동된 바 있어 무료로 수술을 결정했네. 앞으로 부친께서는 이번 수술뿐 아니라 또 다시 병이 재발하더라도 끝까지 병원에서 책임지고 치료비를 전담하겠네”
이 기적과 같은 사건은 그를 평생 봉사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고 한다. ‘나도 평생 다른 사람을 돕고 살겠다고’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삶, 평생 봉사의 시작
봉사의 첫 걸음은 무의촌 진료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아직 학생의 신분인지라 학교 레지던트, 인턴 선배들과 함께 개인봉사부터 시작된 것이 훗날 광주에 개원의가 된 후에는 매주 일요일마다 남도의 면 단위 마을과 바닷가 섬마을 중에서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수십 년을 무의촌 봉사를 다니게 된다.
그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의촌 무료진료가 취미라고 대답한다. 두메산골 산마루 고개를 넘으며 등산을 하게 되고 섬마을로 다니며 바다를 보게 되니 말이다. 그가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진료를 하는 날에는 온 마을에 진료를 보기 위한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와 장사진을 칠 때가 많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전 국민건강보험 시대를 맞이하여 무의촌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무의촌 봉사에 이어 그는 봉사의 규모와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로 확장하여 이웃사랑 10가지 운동을 실행하게 된다. 1990년 광주광역시치과의사회장 임기동안 그는 소년 소녀 가장 돕기, 독거노인 무료의치진료사업, 장애우돕기 등 이웃사랑 10가지 운동을 건의하고, 이 운동은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다. 한 개인의 이웃사랑에 대한 노력이 사회로까지 확산하여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비행 청소년 교화 봉사, 국제라이온스협회와 함께하는 이웃사랑 5000 봉사 등 많은 봉사를 실천하였고, 그의 이런 봉사 이력은 1995년 당시 직업소년원 원장이셨던 허상회 원장과 만남을 통해 무료 급식소 봉사로까지 확장되게 된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사회복지법인 ‘개미꽃동산’ 창립멤버가 되어 허상회 원장과 함께 1991년 광주공원에 ‘사랑의 식당’을 열었다. 초대 이사장을 지낸 허 원장이 작고한 뒤 2018년부터 ‘사랑의 식당’ 이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노숙인과 독거노인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평생 봉사의 마지막 자리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한 끼 식사
사랑의 식당은 매일 800여 명의 노숙자와 독거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무료급식이지만 여유가 있는 몇몇에게는 100원 밥값을 받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존중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일 800여 명의 식사를 대접하려면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전문 영양사와 조리사가 필요하고 매일 20여 명의 자원봉사자의 손길도 절실하다. 식자재는 나라에서 후원 받고 있지만, 전문인력의 월급 및 운영비와 관리비는 오롯이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사랑의 식당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봉사의 기쁨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그는 어느 꽃이 핀 봄날에 식사를 하기 위해 사랑의 식당이 있는 언덕을 올라오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과 그 사랑을 기쁨으로 받는 사람이 함께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식당은 그저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그곳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희망의 장소다. 매일 800여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배고픔을 달래고, 따뜻한 식사와 함께 사랑을 느낀다.
박종수 원장이 걸어온 길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그리고 우리 모두는 혼자 일 때 보다 다른 이와 함께할 때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