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전남대학교와 호남학연구원 주관, 한국학호남진흥원·광주 광산구 주최로 ‘고봉 기대승 선생(1527~1572) 서세 450주년 기념행사’가 국회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올해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450년이 되는 해다.
고봉선생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분이다. 1527년에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1572년에 별세하신 고봉은 3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 58세의 퇴계를 만났다. 고봉이 과거에 늦게 급제한 이유는 집안 내력에 앙심을 품은 세도가가 정치적인 의도로 일부러 방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두 분은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논쟁’을 벌이며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서울대 총장에게 교육부 수습 사무관이 세상의 이치를 두고 학문적인 논쟁을 벌인 셈이다. 고봉은 100여권 분량의 <주자대전>의 중요 대목만 뽑아 3권으로 요약한 <주자문록>을 집필하여 한국 주자학에 크게 기여했다.
고봉 기념행사가 국회에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연적 역사성에 소름이 돋았다. 고봉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입신양명하고 조선 최대의 유학자인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가 너무 청빈하고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고을 수령이 임금에게 상소해 관청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른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요즘 뇌물사건으로 얼룩진 국회에서 장례비용도 만들어 놓지 않을 만큼 청빈한 삶을 살았던 고봉의 기념식이 열린다니 그 역사적 우연성에 놀랐다. 아마도 행사를 주관한 이들은 고봉의 학문적 업적을 보고 결정했을 것이지만, 역사는 준엄하게 이 시대에 부정부패한 위정자들을 고봉의 청빈하였던 삶으로 질타하는 느낌이다.
고봉선생을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시는 분이 한 분이 계시다. 같은 시대에 사셨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해 고봉과 같은 이기일원론을 주창했던, 지금 오천원권 지폐에도 실린 율곡 이이시다. 율곡은 고봉보다 10년 늦게 태어나셨지만 모든 환경이 고봉과 달랐다. 율곡은 강원도 최고 집안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고 최고 명문가 아버지를 둔 역대급 엄친아였다. 물론 율곡의 천재성과 업적은 인정하지만 늘 고봉선생을 생각할 때면, 현대 사람들에게 고봉보다 율곡이 더 유명한 이유에 두 분의 집안 환경과 경제적인 차이가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아버지가 그림공부를 하라고 당시 집 몇 채 값인 안견의 그림을 사주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율곡은 최고 재벌가 아들이었다.
반면 고봉은 정치적으로 견제를 받던 몰락한 집안에 가난하고 청빈하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율곡과 신사임당은 화폐에까지 오르는 유명인물이 되었지만, 고봉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 중에 서세 45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고 하니 필자 또한 지면을 통해 반가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서 기쁘다.
대제학이며 최고 유학자 이황이 주장한 사단칠정 이기이원론(사단은 정의로운 마음으로, 가엽게 여기는 측은지심, 악을 미워하는 수오지심, 사양할 줄 아는 사양지심, 옮고 그름을 아는 시비지심이고, 칠정은 감정으로 희노애구애오욕이며, 수행을 통하여 사단은 키우고 칠정은 눌러야 한다는 이론)에 대해 “내 마음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사단과 칠정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에 평생 깊은 의심이 들었습니다(平生深疑).”라고 32세에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의연함이 있던 분이다. 물론 이렇게 어린 학도의 당돌한 반론에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고 같은 학문을 하는 도반으로 인정해주고 고봉을 공이라 칭하고 자신을 황이라 칭하며 편지를 주고받은 이황은 진정한 학자이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결국 위대한 스승의 위대한 생각과 행동이 훌륭한 제자를 만들어냈다. 만약 이황이 자신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한 고봉에게 분노하고 불이익을 주었다면 한국 유학 발전 또한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훌륭한 스승이 만들어질 수도 없고 제자도 없는 무너진 교육환경과 윤리부제인 시대에 뇌물과 당리당략으로 싸움만 하는 국회에서 개최되는 고봉기념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