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국민,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였으나 아직도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반도의 땅에 잠들어 계신 분이 많다. 이에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있다.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으나 어딘가에 잠들어계시는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을 진행 중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만 해도 전사자는 대체로 숨진 곳에 묻혔다. 그래서 참전국 본국에 ‘무명용사의 묘’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변화를 일으킨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치른 후 전사자 유해를 본토로 송환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73년 실종자와 전사자를 찾는 전문 기관인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좌우명은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이며, 부대 휘장에 새긴 문구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다. 전쟁 실종자나 전사자는 반드시 가족에게 인계하는 것을 기관의 설립 목적으로 분명히 한 것이다.
나아가 2016년 1월 JPAC에 미공군 생명과학연구소 등 2개 기관을 더해 미국방부 전쟁포로 실종자확인국(DPAA)으로 확대했다. DPAA에는 유럽 지중해 작전 부서와 아시아 태평양 부서까지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은 물론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까지 찾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2007년 1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휘호석에 새겨진 문구다. 2000년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사자 유해 발굴이 한시적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 4월 첫 발굴지가 칠곡 다부동의 369고지였다. 첫 전사자 신원확인은 땅 밑 공간에 웅크린 자세의 유해와 유품이 같이 나왔고 유품에 적힌 이름으로 유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유가족이 수십 년간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난 순간이었다. 이 일을 모티브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만들어졌다.
이후 15년 동안 유해발굴감식단은 전국에서 9,8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최근에는 비무장 지대 남측 일대에서의 발굴 작업으로 400여 구로 추정되는 유해 2,300여 점과 유품 8만5,000여 점을 수습했다. 하지만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비무장지대 주변 격전지와 북한 내 유해 발굴은 손도 못 대고 있다. 현재 우리 땅에 묻혀있는 6·25 전사자 유해는 모두 1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중 3만9,000여명은 북한에, 1만3,000여명은 비무장 지대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고 2000년 이후 발굴된 전사자 유해는 1만2,000구가 넘었지만, 신원이 확인된 비율은 1.3%에 불과해 더욱 안타깝다. 또한 유가족이 대부분 70대 이상의 고령이라 DNA 채취를 서두르지 않으면 영영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유가족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그 자리에서 가족 품으로 돌아갈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전사자를 위해 오늘도 DNA 사료 채취에 참여하며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73주년을 맞는 6·25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미국과 베트남 관계 정상화의 성공적인 토대가 된 것이 미군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문제였다고 한다. 베트남 당국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이 문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베트남은 1988년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가 발전해 1995년 양국 공식 수교로 이어졌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사자 유해 발굴이 세계 여러 나라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끝까지 찾는 것은 국가의 도덕적 채무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다. 국가를 위한 헌신에 대한 우리사회의 기억과 추모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 할 가치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굳게 그렇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