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템임플란트가 고객만족에 최우선한다는 모토로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본지는 인테리어의 브랜드화를 선언한 오스템 인테리어의 결과물을 직접 찾아 소개한다. 이번 호는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경남 진주시에 새롭게 개원한 정형주 원장(우리들치과병원)을 만나, 오스템 인테리어에 대한 평가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치과 안에 있는 모두가 편안한 공간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일은 공간에서 이뤄진다. 각각의 일을 잘 처리하고,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바로 ‘공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조금 과장한다면 공간에 대한 철학이 ‘일’의 결과,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정형주 원장의 치과 공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은 ‘환자와 직원 모두가 편안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템인테리어가 우리들치과병원의 공간을 조성할 때 잡은 컨셉은 ‘언제든 편안하게 머물고 싶은 카페테리아 치과병원’으로, 정형주 원장은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한 공간에 대한 개념이 잘 반영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치과병원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치과들과 마찬가지로 환자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가구와 소품이 배치돼 있다. 조금 특이한 것은 대기실 공간을 이원화해 한 켠에 작은 카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 낮은 탁자와 편히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배치한 대기실과 달리, 카페 공간은 탁자와 의자를 배치해 독서를 하거나 노트북을 펼쳐 간단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 원장은 “환자들이 대기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각자의 일상까지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공간적인 배려를 주문했다”며 “치과의 딱딱함을 감성적인 카페 공간으로 재해석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치과병원은 대기실 카페 공간의 외부 파사드 간판을 비슷한 감성으로 제작하고, 중앙 복도에는 고급스런 샹들리에 LED등을 이용해 따뜻한 공간을 연출했다. 전면 출입구는 우드 갤러리 게이트로 연출했고, 넓은 유리벽을 통해 모던한 치과 내부 디자인과 카페 공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입구에서부터 편안함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직원들이 편안해야
정형주 원장이 생각하는 치과 공간에 대한 컨셉 중 더욱 중요한 부분은 바로 ‘직원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치과병원은 총 65평 규모로, 수술실을 포함해 총 7대의 유니트 체어를 설치했다. 환자를 위한 대기실, 환자가 최대한 편안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진료 공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정 원장이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직원들만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정형주 원장은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다보니 정작 그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며 “진료공간은 최상의 진료 결과물을 얻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환자와 접점이 없는 업무 공간, 즉 직원만이 사용하는 공간을 효율성만 따져 구성한다면 업무 스트레스를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우리들치과병원은 소독실, 기공실, 탈의실 등 직원업무 공간을 최대한 확보해 직원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치과의사로서의 재능, 이제는 고향에서
5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정형주 원장은 새롭게 이전 개원한 이유에 대해 “치과의사로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고향을 위해 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경희치대를 졸업한 그는 졸업 후 서울 중심가에서 오랜 기간 개원의로 활동했다. 국내 임플란트 도입 초기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임플란트 연수를 받고, 각종 학회 및 임플란트 연구회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신학을 따로 공부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인 정 원장은 “치과의사로서 제2의 삶을 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없다. 다만, 이제는 지역민을 위해 봉사하는 치과의사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치과의사들은 40대가 치과의사로서 가장 정점에 이르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 시기를 거쳐 이제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정형주 원장은 “이곳 진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자리를 옮겨 30년 넘게 살았지만, 언제나 마음은 고향에 있었던 것 같다”며 “치과의사가 되고 또 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고향이 주는 보이지 않은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늦기 전에 고향사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전했다.
신종학 기자 sjh@s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