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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한치과의사협회 기원(起源)으로 결정된 조선치과의사회, 과연 우리의 뿌리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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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훈 원장(미래아동치과의원)/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 초대회장은 일본인 나라자키 도오요오

 

1935년 9월 28일 조선연합치과의사회는 창립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축하연을 개최하였다. 장소는 그 시절 경성 치과계를 주름잡았던 일본 치과의사들의 추억이 가장 많이 담긴 경성호텔이었고, 축하연은 매우 성황리에 치러졌다.

 

이날 저녁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의 초대 회장인 나라자키 도오요오(楢崎東陽, 1872-1937)가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기에, 그 당시 조선 치과계의 공로자들을 초청하여 창립 15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인 회고(回顧) 좌담회가 열린 것이다[그림 1].

 

이 좌담회 자료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치의학 잡지 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 제5권(1936년)에 게재되었고[그림 2], 대한치과의사협회 명예 회원인 故 최효봉 선생이 번역한 기록물이 남아있어 약 85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의 치과계에도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좌담회는 1935년 9월 28일, 1936년 3월 11일과 7월 17일 이렇게 세 차례 진행되었다. 특히 첫 번째 좌담회에 주목이 가는 점은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치과의사 단체인 한성치과의사회의 회장인 함석태(咸錫泰)도 참석하였다는 점이다. 아마도 한성치과의사회 회장 자격으로 축하연에 초청되었고 좌담회 자리까지 있었던 것 같다.  만선지치계에 실린 좌담회 기록에 함석태 선생의 발언은 전혀 없다. 그리고 1936년 두 차례 있었던 좌담회에는 참석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함석태 선생은 그 좌담회에서 나온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발언이 불편하였기에 묵묵히 듣기만 했던 것이고 그 이후로는 참석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종합하면 함석태 선생의 조선치과의사회 활동은 나라 잃은 백성이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협조이지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에 1936년 7월 17일 세 번째 좌담회에서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회고한 내용을 지면 중계하고자 한다. 좌담회 내용을 읽어보면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가 창립된 이유는 이렇게 해석된다. 치과의사의 수보다 더 많은 입치사들이 일으키는 윤리적 문제의 해결방안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치과의사들이 대동단결하여 조선총독부에 문의하였고, 그 해결책으로 전 조선에 있는 치과의사들로 구성된 단체를 설립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1912년 설립된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친목 모임인 경성치과의사회를 중심으로 부산과 평양에 있는 일본 치과의사들을 설득하고 조선치과의사회 창립총회에 참석을 읍소하여 가까스로 탄생한 치과의사단체다.

 

간단히 말하면 조선총독부의 행정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었을 고통, 굴욕, 비굴함, 비탄, 울분, 분노를 상상하면서 대한치과의사협회 기원 100주년 기념행사에 관한 치과계 신문을 접하니 필자 또한 모든 감정이 뒤범벅되어 한동안 멍해진 경우가 요즘 자주 있곤 한다. 우리 치과계가 긴 역사에 연연하고, 40년 전 대의원총회 결정에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 이번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

 

선학들의 연구에 의하면 1921년 10월 2일 조선치과의사회가 창립한 날 조선인 치과의사는 함석태와 한동찬 단 2명뿐이었고 그들의 창립총회 참석자 명단과 입회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함석태는 1912년 일본치전을 졸업한 후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면허를 취득하여 1915년 10월 경성에, 한동찬은 1917년 동경치전을 졸업한 후 1918년 치과의사 면허를 받은 후 평양에 개원하였다. 지금부터는 조용히 치의학 역사를 돌이켜보고 분석해서 지금의 시대정신을 충족시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아래는 조선연합치과의사회 주최로 1935년 9월, 1936년 3월, 7월에 개최됐던 좌담회 기록 중 일부다.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하여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다음은 조선치과의사회로 넘어가겠다. 조선치과의사회는 1921년(대정10) 10월에 창립하여 발기인은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미쓰다 소오(滿田操)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었다. 당시 치과의사의 수도 적었고 경성, 부산, 평양에만 치과의사회인 듯한 회가 있었을 뿐이어서 그런 회를 만드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 수가 적다고 해도 여러 가지 의사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입치사 문제도 시끄럽게 말이 많았고 치과의사 시험제도는 아예 없었고 해서 우리는 조선치과의사들이 대동단결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한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단위로 조선치과의사회를 조직했었다.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당시의 회원은 22명 정도로 생각한다[그림 3].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20~30명쯤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은행집회소에서 제1회 총회를 개최했다. 그때 카와우치(河內)씨가 와있었던가?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오지 않았다. 부산에서 별부(別附), 고교(高橋), 웅야(熊野), 즐교(櫛橋), 평양에서 등정(藤井), 죽하(竹下), 마산에서 야촌(野村), 그 당시 총독부 위생과장인 촌전승청(村田昇淸)씨가 내빈으로 참석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은 모두 23명쯤 될 거다.  말하자면 23명의 참석으로 조선치과의사회가 창립한 것이다.

 

미쓰다 소오(滿田操) : 당시 총독부에서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해 지방단체를 규합하여 그 단체에 의해 조선치과의사회란 것을 만드는 방법이 좋겠다고 해서 우리 창립회원들은 이점을 많이 고려했다. 그러나 현재의 수요를 본다면 각 지방에는 단체가 없는데 그것을 규합해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선 중앙에다가 만들어 놓고 개인별로 각 지방 회원들을 흡수코자 했다. 그것이 오늘날 점차 각 지방에 단체가 생기게 된 이유다. 그 해가 언제던가?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연합치과의사회로 된 것은 1932년(소화7)경이다.

 

미쓰다 소오(滿田操) : 1928년(소화3년)부터 도내가와 세이지로오 씨가 회장으로 있으면서 약 3년 걸려 겨우 연합치과의사회의 형식이 갖춰졌다. 당시 창립자 및 역대회장은 고생이 많았다.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내가 경치 부회장시절일 때 조선치과의사회를 만들어야만 하게 된 이유가 있다. 경성치과의사회에서 입치사의 문제 및 시험제도의 문제 등을 경기도의 위생과장에게 진정해도 그는 경기도만 감독할 뿐 조선 전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할 수 없다고 해 하는 수 없이 총독부의 위생과장에 말했다. 그러나 총독부 위생과장 왈 “그것은 경성치과의사회 의견이지 전 조선의 목소리는 아니다”며 회피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 끝에 이것이 전 조선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전 조선적인 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전 조선의 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적으로 말하면 회 단위로 되어야겠지만 우선 전선치과의사의 대회를 개인별로 모이게 했다. 그런데 그 후 경성치과의사회가 발기하게 되어 전선의 회원에게 그것을 권유하고 이해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오오자와 기세이씨가 평양에 가서 설득시키고, 나는 부산만이라도 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권 훈 원장(광주 미래아동치과의원장)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조선대학교 치과병원 소아치과 수련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겸임교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총동창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대한소아치과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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