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모두가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가 점차 일상에서 사라지고 새해엔 완전한 일상생활을 꿈꾸어봅니다. 동양철학에서 계묘년은 열 번째 천간으로 수水인 계癸와 네 번째 지지로 봄과 토끼를 의미하는 묘卯로 구성되었으며, 겨울잠에서 깨어나 눈밭 위에 나온 ‘예쁜 검은색 토끼’로 봄에 움직이기 시작한 토끼해입니다. 비록 들녘에는 아직 눈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의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하고 앞으로 다가올 여름의 풍성함을 꿈을 꾸는 토끼입니다. 천간의 癸는 확산 성향을 지닌 안개 같은 壬을 수렴하여 실체가 있는 습기를 머금은 이슬 같은 水로 癸입니다. 습기가 있다함은 밀가루를 반죽할 때 물기가 있어야 뭉치듯이 새해엔 내부적 갈등이 있다 해도 같은 편끼리는 사이좋게 뭉쳐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해입니다. 癸는 10개 십간의 마지막으로 새로 시작하는 다음 해인 갑진년의 甲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지지 卯는 방위로는 정동진의 正東을 의미하고, 계절로는 아직 한기는 남아있으나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입니다. 卯의 봄에 땅 위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땅 밑에서 다음 달에
아침에 눈을 뜨니 서설이 내리고 있다. 동짓날에 눈이 내리니 서설(瑞雪)이다. 서설이란 ‘상서러운 눈’이란 뜻이다. 동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실과 희망이다. 현실적 의미는 밤이 가장 길고 해가 가장 짧은 날이다. 지나온 한 해 동안 비축한 식량과 땔감을 많이 해놓았다면 즐겁고 푹 쉴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다. 반면 비축한 것이 없다면 긴 밤과 추위를 견뎌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이 된다. 또 다른 의미는 동지가 지나면서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멈추고 새벽이 오는 것처럼 새로이 시작되는 날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사람의 일에서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집을 한 채를 지어도 터를 볼 때 시작된다. 김장하는 것도 몇 포기를 할 것인가를 정할 때 시작된다. 옛날 중국 성현 소강절은 ‘하늘은 자(子)에 열리고 땅은 축(丑)에 열리고 인간은 인(寅)에 열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12간지에서 처음 시작하는 자월은 처음으로 태양빛의 길이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하늘이 열린 다음 땅이 열린다 함은 땅속에 품어진 겨울잠을 자는 모든 생명체에게 새로운 기운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월에는 사람들이 한
이제 올해도 약 2주일을 남기고 있다. 모든 일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올해도 마무리되고 있다. 끝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도 있지만 설렘도 있다. 이맘때면 상투적으로 지나온 한해가 다사다난하였다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늘 돌아보면 현실에서 언제 다사다난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올해 역시 돌아보면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2년을 끌어오던 코로나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이 당연해졌다. 올해 초 금방 끝날 것처럼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원자재 가격을 급격히 올려놓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세상사가 늘 바뀌는 것과 바꾸지 않는 것이 있는 탓인지 대통령은 바뀌었건만 정치인들 싸움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가 몇 년간 우려와 걱정으로 바라보던 부동산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금리를 올렸고 이달 15일에 또 올린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은 미국금리 인상이 지나봐야 알 듯하다. 나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력으로 월드컵 16강을 진출하는 쾌거도 있었다. 개인적인 일보다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일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미 우리 일상 모든 일에 영향을 주고 특히 큰일일수록 더 큰 영향을 받기
1+1=2는 수학적으로 참이다. 한편 경제학에서 1+(-)1=0이 되는 것을 제로섬이라 한다. ‘나의 이득+너의 손실=0’이다. 제로섬은 한정된 공간에서 각자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타협 없이 독점하려는 의도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에서는 나의 이득이 반드시 너의 손실이 아닌 경우도 있다. 나의 이익이 너의 이익이 되는 1+1=2,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이 상승효과를 지닌 경우 1+1=3, 나의 손해가 너의 손해가 합해진 (-1)+(-1)=-2가 되기도 한다. 한정된 공간의 사회가 반드시 제로섬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례가 과거 봉건사회다. 봉건시대에 한정된 공간(지역)에서 투쟁은 공멸을 초래하거나 서로에게 심각한 상처를 준다는 것을 각자가 인지하기 때문에 상호 회피 본능으로 타협을 통해 화합을 이뤄 발전했다. 한 영지에는 한 명의 구두수선공과 한 개의 양복점이 있어서 서로 싸움이나 경쟁을 회피했다. 그들에게 타협과 협상 그리고 화합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사회학자들은 산업화로 영주민들이 대도시로 이동하면서 봉건사회에서 민주주의사회로 이양됐다고 한다. 유럽이나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 생존을 위해서는 투쟁이 아닌 타협
아침 뉴스 기사를 읽는데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운 내용에 기가 막혔다. 월드컵 가나와의 경기에서 진 선수들을 비난하는 악플이 달렸다는 기사다. 경기를 지켜본 필자가 분함을 식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더욱더 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악플을 달 수 있단 말인가. 선수들이 진 것 말고는 잘못한 행동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비난하는 것인가. 오로지 졌다는 이유로 비난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인 일이다. 악플을 단 자들 눈에는 선수들의 노력과 투혼과 아픔이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악플이고 누구를 위한 악플인가. 어제 누님과의 통화 중에 가나 경기에서 진 것이 속상해서 지난밤에 잠을 잘 못 잤다고 들었다. 필자도 경기가 끝나고 같은 심정이었다. 정확하게 경기는 아쉽고 억울하고 화가 날 만큼이었다. 우루과이 경기처럼 골대가 도와주는 운도 없었다. 처음 2:0으로 지던 포기 상태에서 2:2가 되며 강한 희망을 지녔고 3:2로 지고 마지막 코너킥을 몰수당하면서 끝난 경기는 심리적으로 아쉬움과 억울함을 최고로 극대화하였다. 경기를 본 모든 국민이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 표출되는 방식은 모두가
지난 23일 전남대학교와 호남학연구원 주관, 한국학호남진흥원·광주 광산구 주최로 ‘고봉 기대승 선생(1527~1572) 서세 450주년 기념행사’가 국회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올해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450년이 되는 해다. 고봉선생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분이다. 1527년에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1572년에 별세하신 고봉은 3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 58세의 퇴계를 만났다. 고봉이 과거에 늦게 급제한 이유는 집안 내력에 앙심을 품은 세도가가 정치적인 의도로 일부러 방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두 분은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논쟁’을 벌이며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서울대 총장에게 교육부 수습 사무관이 세상의 이치를 두고 학문적인 논쟁을 벌인 셈이다. 고봉은 100여권 분량의 <주자대전>의 중요 대목만 뽑아 3권으로 요약한 <주자문록>을 집필하여 한국 주자학에 크게 기여했다. 고봉 기념행사가 국회에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연적 역사성에 소름이 돋았다. 고봉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입신양명하고 조선 최대의 유학자인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가 너무
우리나라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다. 한자 安(편할 안)과 寧(편안할 녕)에서 유래한 단어다. ‘무탈하게 편안하시냐?’는 의미를 지닌다. 최근 유행한 트로트 가사처럼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를 먹었던 보릿고개나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호환마마, 그리고 3일에 한 번씩 겪었다는 외적의 침입 등으로 어렵게 살았던 조상들의 애환이 섞인 단어다. 아침에 부모님을 뵈면 처음 하는 인사말이 “안녕히 잘 주무셨습니까?”다. 이 또한 땔감이 떨어져 춥게 잤거나, 먹을 것이 부족해 하루 두 끼를 먹던 시절에 저녁밥을 빨리 먹고 일찍 잠을 자면 자다가 배고파서 깨고는 다시 잠이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온 인사말이다. 이렇게 우리 삶 속에서 잘 자는 것은 잘 사는 것의 인디케이터였다. 그런데 최근 잠 못자는 사람들이 다양한 연령층에서 증가하고 있다. 며칠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0~9세 소아불면증 환자가 작년에 58.1%, 올해 7.4%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60세 미만 불면증 환자 중에서 증가폭이 가장 큰 나이가 0~9세로 평균 3.9%보다 두 배 증가했으며, 다음으로 10~19세가 7.2% 증가했다. 통상 노년에서 불면증이 증가하는 것에 상반된 이례적인 양상이
지금도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 중에 중학교 시절에 배운 노래 하나가 있다. 미국 민요를 번안한 ‘메기의 추억’이다. 한국에서 가사를 번역할 때는 2절에서 메기가 백발이 된 것으로 하였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메기의 추억은 조지 존슨이라는 캐나다 시인의 ‘메이플 립스’ 시집에 실린 시를 가사로, 그의 친구가 곡을 만들어 주어 탄생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고등학교에 마가렛(애칭:메기) 클라크라는 꿈 많은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새로 부임해온 캐나다 출신 조지 존슨이라는 총각 선생에게 첫눈에 반한다. 메기는 조지와 사랑에 빠지고 졸업을 하고 둘은 결혼을 하지만 메기가 폐결핵으로 투병 생활을 한다. 그때 같이 금잔디 동산이나 물레방아가 도는 언덕 등을 오르며 나누던 이야기를 틈틈이 시로 쓰고 나중에 시집이 되었다. 투병하던 메기는 아들을 출산하고 다음 해 24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기차로 메기 고향으로 운구하던 중에 어린 아들이 칭얼거리며 계속 엄마를 찾으며 울자, 그는 열차 객실에 있는 승객들에게 “이 기차 뒤에는 나의 아내이며 아이의 엄마가 관 속에 누워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할 때 사람이 서 있으면 반드시 정지해야 하는 것으로 교통법규가 바뀌었다. 한번 쉬었다 출발하면 안보이던 것도 보이고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물론 급한 사람이라면 더 여유가 없어질 수도 있지만, 통상은 움직임이 느려지면 마음의 폭은 열린다. 운전하다가 얄밉게 끼어드는 얌체족들이 보이면 정말 끼워주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때 브레이크 한번 밟고 넣어주면 얌체족이 혜택을 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 때문에 흐름이 막혀서 피해를 보던 뒤차들은 혜택을 받는다. 요즘 필자는 누군가 끼어들기를 원하면 넣어준다. 뒤차들의 흐름도 빨라질 것이고 끼어드는 사람이 얌체족일 수도 있지만 빨리 가야 할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누군가 빠르게 움직이면 한걸음 속도를 늦추어 자리를 비켜준다. 그러면 바쁜 사람은 빨리 가고 필자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가끔 드라이브를 위해 2차선 국도를 달리다 보면 뒤차가 맹렬히 달려와 차 뒤에 바짝 붙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필자는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세우고 뒤차를 먼저 보내고 커피 한 잔이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었다 간다. 혜민 스
지인으로부터 받은 문자 중에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라는 글을 보았을 때 지금 치과의사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SNS에서 초저가 임플란트 광고가 부쩍 증가했다. 말로만 듣다가 처음 광고를 보았을 땐 참담함을 넘어 허탈한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교정의라서 평생 임플란트를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이유가 없어 관계없는 사건일 수도 있지만,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그것을 취급하는 직업의 가치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0원짜리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과 10만원짜리 케이크를 파는 백화점 점포에서 주는 이미지가 다르다. 도로 위 자동차가 최근 들어 절반 정도가 외제차인 시대에 300만원 임플란트를 취급하던 시절의 치과의사와 30만원대 치과의사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는 다르다. 외제차를 선호하는 심리를 지닌 고객 눈에 분명히 달리 보인다. 모든 환자가 싼 가격 치과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최저가가 등장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환자가 치과의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사람
이번 국감 자료에 의하면 2021년 서울시에서 2,03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됐다. 60대 이상(32.2%), 50대(17.4%), 20대(17.4%), 40대(16.7%), 30대(16.5%)였다. 그중 20대(9.3%)와 60대 이상(8.4%)에서 전년도에 비해 증가했고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감소했다. 10년간 서울 자살자가 2만1,577명이라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연간 24만명 정도 신규 암 환자가 발생하고, 현재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암 유병자 수는 약 215만여명이다. 이들은 매일 살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 누군가는 살기 위해 노력하고 누군가는 죽으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이들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은 모두가 다르다. 암투병하는 사람들에게 살려는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당연함을 거역하는 이들의 이유는 알아야 한다. 같은 이유로 행하는 같은 행동을 막기 위해서다. WHO 보고에 의하면 여성보다 남성이 높고, 우리나라도 2.5배 높다. 미국에서는 70%가 백인 남성이었다. 2018년 선데이저널에 의하면 60~80%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이 원인이었다. 이혼녀보다는 이혼남이 2
볼일이 있어 테헤란로의 커피숍에서 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추리닝을 입은 젊은 여성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최근 들어 집에서 입던 추리닝조차 거리 패션이 되었다. 20대 젊은 여성들이 추리닝으로 병원에 내원하고 지하철에서도 자주 보인다. 1년 전 즈음, 화장한 얼굴에 추리닝 차림으로 유니트체어에 앉아있는 언밸런스한 환자를 처음 대하고 조금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필자를 돌아보며 스스로 구시대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한 날이기도 했다. 테헤란로에서 본 추리닝 패션은 또 다른 감회를 주었다. 테헤란로는 1970년대 말경에 서울시가 테헤란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명명했다. 그런 테헤란시에서 지금 히잡시위가 한창이다.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다치거나 사망하고 구속되는 일이 진행 중이다.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감금된 뒤에 사망한 여성이 구타를 당하였다는 의심을 받으며 촉발된 시위다. 축구경기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여성차별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히잡시위로 전개되고 있다. 여성차별에 저항하는 테헤란 여성 이미지와 추리닝 패션으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한국여성 모습이 너무도 극단적인 대조를 보였다. 2022년이라는 현
며칠 전, 서울 모 아파트에서 20대와 30대 남녀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변함없을 미래에 희망이 없어서 떠난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소식을 접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미래 희망을 잃고 사라져간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과연 그들이 잃어버린 미래의 희망이란 무엇이었을까?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미래 희망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자주독립이 희망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으며, 군사정권시절에는 자유민주 정부가 희망이었다. 현시대에서 그들이 포기한 미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결혼하던 80년대에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반지하든 단칸방이든 같이만 있을 수 있으면 좋았다. 얼마 전 TV에서 30대 출연자가 최소한 아파트가 아니면 결혼해서 고생할 의미가 없다고 했다. 필자 세대가 어릴 때는 TV가 마을에 한두 집이나 있을 정도였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던 세대다 보니 없는 것에 익숙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2030세대는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경제적으로 모두 어렵게 살았던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었다. 2호선 강변역에서 출입문이 열린 채로 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안내방송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로 합정역부터 모든 역에서 열차가 멈추었고 언제 출발 가능할지 모른다고 알렸다. 그동안 뉴스로만 듣던 일이 필자 출근길까지 막았다. 일단 밖으로 나왔지만 필자와 같은 처지의 인파로 택시를 잡는 것도 어려웠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지만 마을버스로 30분이 걸리니 진료시간을 맞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병원에 전화해 30여분 이상 늦을 수 있으니 예약 환자에게 양해를 구해 달라고는 우여곡절 끝에 35분 만에 도착했다. 40분 이상을 기다렸던 환자에게 변명과 사과를 시작으로 정신없이 오전이 지났다. 살다 보면 지하철 멈춤처럼 생각하지 못한 사건이 불현듯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질병으로 오고 어떤 이는 사고로 오기도 한다. 60세가 넘으니 뇌졸중으로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고, 암 투병 중인 지인들도 있다. 모 외제차 화재사건이 한창이던 시기에 갑작스런 부고에 조문을 가보니 차량 화재 피해자이신 지인도 있었다. 정신없이 오전을 정리하고 커피 한잔을 마주하니 다양한 생각에 잠겼다. 오늘 필자는 조금 바쁘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전문지식을 지닌 치과의사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를 만난다. 예를 들어 소아교정에서 상악 제1대구치를 후방으로 밀어야 하는 경우에 제2대구치의 맹출 여부는 중요하다. 맹출 전이 좋지만 엄마가 스스로 생각하여 모든 치아가 맹출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를 치과에 데리고 오는 경우가 있다. 상태가 심하지 않으면 다행으로 심한 경우 발치교정를 해야 하기도 한다. 비발치 치료라는 선택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가슴으로 수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엄마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면 짜증 내거나 심지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을 필자는 ‘자신이 항상 옳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항상 옳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으로 타인의 충고나 지적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의외로 주변에서 한 두 명 정도는 발견된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 사이에서 아주 사소한 충고나 조언조차 수용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 감정적으로 심하게 폭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격장애를 의심해 봐야 한